자존감이 아니라 자기연민이 필요하다
삶이란 고달프다. 아무리 피하려 애써도, 정서적 고통은 어디든 우리를 따라다닌다. 수치, 분노, 외로움, 두려움, 절망, 당혹감 같은 힘겨운 정서들이 꼬박꼬박 문간에 찾아온다. 그런 정서는 만사가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찾아든다. 또는 흔히 겪는 질병, 노화, 사망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이럴 때 대개는 수치심을 느끼면서 자기비난에 휩싸인다.
도대체 난 뭐가 문제지?
왜 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까?
왜 하필 나야?
우리는 스스로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에 자신에게 모욕도 모자라 상처까지 입히는 어리석음을 계속 저지른다. 우리는 자기한테 숨통을 틔워주기보다는 최대한 자기에게 맞서는 길을 찾아내려 든다.
어려움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존감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다. 그래서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어떻게 자존감을 키울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방법들이 관심을 받고있다.
자존감은 분명 긍정적인 힘이있다. 그러나 지나칠 경우 자칫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나르시시즘은 큰 실패를 겪을 경우 급속히 허물어지는 경향이 있다.
과거 어느 세대들보다 자존감은 높지만 심리적인 유연성이 떨어지는 요즘 대학생들이 그렇다. 이들은 형편없는 시험 성적을 받거나 취업에 실패하고, 다른 이들의 비판을 들으면 방어적이 되고 쉽게 불안과 우울증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자기연민보다 ‘자기처벌’ ‘자기비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시대에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한국일보, 2018.03.28)
최근, 삶에서 가장 중요한 스킬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기 연민’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학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공감과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하버드 의과대학원의 임상심리학자이자 40년 넘게 명상과 심리학을 접목해온 크리스토퍼 거머 박사는 ‘자기연민’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감정에 대처하는 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새롭고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괴로움과 고통을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기연민이란, 수용의 한 형태다.
수용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을 가리킨다면, 자기연민은 그런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연민이란 고통스러워하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용과 자기연민은 더 나은 기분을 느끼려고 한사코 애쓰기를 포기한 뒤에 더 쉽게 일어난다. 알코올중독자협회에서는 이것을 ‘자포자기 끝에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을 때, 여전히 기분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도움이 될 만한 게 있기는 할까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신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은 완전히 고갈된다.
이 시점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작업을 옮겨갈 좋은 기회다. 자기연민은 정확히 아무런 의식도 노력도 들이지 않는 태도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분투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면, 가슴은 저절로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기분이 좋아지려고 애쓰기를 그만두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찾아낸다.
‘돌봄’과 ‘치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치유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 때, 우리가 애써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돌봄이란 치유하려는 온갖 노력이 실패했을 때도 여전히 해볼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과 흡사하다. 곧 애써 노력하길 그만두고 부드럽게 죽음의 경험에 동참하는 것이다. 정서 생활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하기를 빨리 멈출수록 더 낫다.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돌봄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진다.
compassion(연민)은 라틴어 어근 com(더불어)과 pati(고통받다)에서 나온 말로, ‘함께 아파하다’라는 뜻이다. 진정한 연민을 보낼 때, 우리는 상대의 고통 속에 동참한다. 연민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때를 알아챈다는 뜻이고, 고통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저항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사랑과 친절이 자연스럽게 고통받는 사람에게로 흐른다는 뜻이다. 연민의 체험은 불편한 감정에 저항하려는 성향을 완전히 포기함을 뜻한다. 연민은 온전한 수용이다. 연민이란 사람, 그 사람이 겪는 고통,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발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다.
자기연민은 남들에게 베푸는 친절을 똑같이 우리 자신에게 베푸는 것일 뿐이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나 일상의 고역을 치러내야 할 때, 그의 주의의 방향을 조금 돌리는 것만으로 우리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잊히거나 억눌려 있더라도 자기연민의 본능이 있다. 사실 자기연민은 고통에 저항하려는 본능보다 훨씬 강력하다.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지레 겁먹지 마라.
한 내담자가 자기연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기연민은 싸우는 것하고는 상관없죠. 그래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군요.”
때로는 단호히 결심하고 수행에 임해야 할 경우도 있다. 물론 예상 가능한 일이다. 낡은 습관은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안간힘을 쓰며 긴장하는지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면서, 똑같은 일을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는지 살펴라. 우리는 삶에 무언가를 보태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통제하고 조작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무의식적으로 부과하는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자기연민을 키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면, 일단 훈련을 멈추고 바로 그 순간 자기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라.
[실천- 자기 돌보기] (소요시간: 5분)
우리는 대체로 남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신경을 쓴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똑같이 주의를 기울이고 사려 깊게 스스로를 돌보는 경우는 드물다.
이 수행은 단 5분밖에 안 걸린다.
조용한 장소를 택해 편안히 앉아 눈을 감은 다음, 몸에서 어떤 느낌이 느껴지는지 주의를 기울여보라. 신체감각이 드나들 때, 어떤 특정한 감각에 주목하려 들지 말고, 그저 그 감각과 함께 머문다. 유쾌한 감각이 들면 느끼면서 그냥 내버려둔다. 불쾌한 감각 역시 느끼면서 그냥 내버려둔다. 손이 따뜻해지고, 앉은 자리의 압력이 느껴지고, 이마가 따끔거릴 수도 있다. 마치 엄마가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듯, 어떤 느낌이 드는지 감각을 알아차려본다. 어떠한 감각이 잇달아 일어나더라도 그저 묵묵히 알아차린다. 시간을 두고 해본다. 5분이 지나면 부드럽게 눈을 뜬다.
한순간의 자기연민이 하루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고, 그런 순간이 모여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자기연민을 발휘해 파괴적인 생각과 정서라는 함정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킴으로써, 여러분은 내면으로부터 자존감을 북돋고, 우울함과 불안감을 줄일 수 있으며, 심지어 다이어트를 계속하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연민이란, 우리가 품는 연민의 대상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먼저 여러분 자신을 따뜻이 껴안고,
이어 더 고귀한 길로 나아가 남들을 껴안게 될 겁니다.
-달라이 라마 Dalai Lama -
자기 문제를 다시 마주 대하고 다룰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려심의 확장을 통해서만, 관계가 향상되고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감이 커질 수 있다.
자기연민은 실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손가락이 베이면, 상처 부위를 깨끗이 소독한 다음 붕대를 감아 치료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고난 자기연민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서가 위험에 처할 때, 자기연민은 어디로 가버리는 걸까?
고통에 사로잡히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에 맞서 전쟁을 치르려 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제자리에서 꼼짝 않기 따위로 위험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자기비난, 자기고립, 자기매몰이라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상처받은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은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가 설명한 대로 자기친절, 세상 사람들과의 연결감, 균형 잡힌 자각으로 우리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연민이다.
■ 참고도서
"내게 상처 준 사람이 나였다면"
나를 아끼고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오늘부터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