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떠올리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다.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은 모두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라고 혀를 끌끌 차며 철없다고 손가락질 하겠지만 그 정도면 많이 참은 거다. 욕이 섞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 인간’도 아니고 ‘그 사람’ 정도면 꽤나 어른스럽게 비난하는 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그 사람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여러 종류의 부딪힘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 사람과 밥을 먹을 때가 특히 싫었다. 그 사람은 반찬 하나를 이쪽저쪽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 정작 그 반찬은 내버려 두고 새로운 걸 집어서 먹는 식이었다. 무엇을 위한 루틴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밥을 먹어야 할 때면 아무 의미 없는 그 행위를 지켜보는 게 지긋지긋했다.
아주 어릴 때는 혼이 날까 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간의 도움을 받아 나도 머리가 굵어지자 어느 날 밥을 먹다 말고 불쾌함을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거지에 그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러더니 입안에 있던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지도 못하고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불쾌함을 처음 쏟아내는 거라 불안했는데 오히려 너무도 뻔한 훈계여서 대놓고 무시할 수 있었다. 그 사람에게 앞으로 나와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선전포고한 셈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차려준 밥을 먹을 때였다. 식탁 위에 내 반찬만 아주 정갈하게 접시에 따로 내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몹쓸 버릇을 고치지 못한 채 반찬통에 들어 있던 나물을 두 번, 세 번 건드리고는 입속에 가져갔다. 그는 아마도 조마조마 했을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녀석이 자신의 젓가락질을 살펴보다가 언제 갑자기 독침을 쏘아댈지 모르니 말이다.
시간들이 더해져 세월이 되고 그 세월마저 흐르니 나는 더 머리가 굵어지고 그 사람은 할아버지에 가까워졌다. 그즈음 같이 식사를 할 일이 있었다. 찌개를 끓여서 냄비째 먹다가 나에게 찌개를 따로 덜어주려고 하는 그에게 설거지하기 귀찮으니 그냥 먹자고 말을 건넸다. 국자를 들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그가 크게 당황하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어찌나 크게 당황을 했는지 국자를 냄비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어, 어.’ 하며 다음 행동을 전혀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식사 자리에서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나는 잘 웃지 않는 그 사람이 가끔씩 던지는 내 실없는 얘기에 아주 파안대소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을까?
아들을 데리고 마트에 가면 종종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른다. 작은 컵에 그 녀석이 좋아하는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 가득 담아 숟가락을 두 개 꽂아서 의자에 앉는다. 나는 절대 먼저 먹지 않고 조용히 한 입 먹여줄 때까지 간절한 눈빛을 하고 쳐다본다. 이런 내 모습에 자기 마음이 다다르면 아들이 서툰 숟가락질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어보라고 권해준다. 이게 뭐라고 참 기분이 좋다. 침을 한가득 묻힌 숟가락이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러다 같이 먹자고 다른 숟가락을 쑤욱 하고 내 얼굴에 들이밀면 그게 그렇게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아들과 둘이 앉아 싱글 컵에 서로의 숟가락을 연신 찔러대며 아이스크림을 퍼먹는다. 나도 개의치 않고 아들도 개의치 않는다. 그 사람이 사고로 죽고 난 후에 혼자 밥을 먹을 때면 가끔씩 냄비째 찌개를 같이 먹었던 선명한 기억들 때문에 왈칵 눈물을 쏟을 때가 있다. 냄비에 서로의 숟가락을 찔러대도 개의치 않았던 그 식사가 그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요동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땠는지 더듬더듬 찾아본다.
그럼에도 반찬 뒤적이지 말라며 못된 말을 쏟아낸 아들놈 때문에 식사도 못 하고 박차고 나간 그 사람이 언제부터 내 반찬을 따로 내놓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내가 ‘그 사람’이면 아들이 먹을 반찬을 접시에 담아 내어줄 수 있을까?
■ 봉태규 에세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