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명 화가 폴 세잔은 말 그대로 ‘사과 덕후’였다
프랑스의 유명 화가 폴 세잔은 말 그대로 ‘사과 덕후’였다.
스스로를 다른 천재 화가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골 화가라고 생각한 세잔은 자신의 부족함을 ‘오래 관찰하는 노력’으로 채우려고 했다. 그리하여 움직임도 없고 잘 썩지도 않으며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사과를 모델로 선택했다. 세잔은 사과를 수도 없이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다.
아무리 오래 관찰을 해도 내가 그릴 수 있는 건 순간의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빛에 따라 사과의 색깔이 어떻게 바뀌는지, 각도에 따라 사과의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집요하게 살폈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사과의 모습들을 하나로 조합해 세잔은 진짜 사과를 완성했다. 생각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깊이 있게 사과를 들여다봄으로써 사과를 대충 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리고 세잔은 사과의 대가가 되었다.
세잔은 기존의 원근법을 따르지 않고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관찰을 바탕으로 세상에 없던 입체감과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사과 덕질’은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또 다른 모던아트의 대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상상을 보태자면 세잔은 사과를 깎아보기도 하고 잘라보기도 하며 오랜 시간 내버려둔 채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한없이 지켜봤을 수도 있다. 그러다 사과가 상하고 썩는 과정까지도 사과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었을 때의 모습부터 다 먹은 후 앙상하게 남은 뼈대의 모습까지 온몸으로 체득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얼마나 적극적인 관찰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커피’라는 제시어를 하나 던져주고 커피에 대해 자유롭게 연상한 바를 써보라는 질문이 주어졌다.
1. 스타벅스 커피
2. 편의점 커피
3. 다방 커피
…
혹시라도 이런 식의 간단한 답을 생각했다면 스스로를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고 위로해도 좋다. 그러나 사고의 폭을 넓혀 생각해보면 이런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1. 커피 향을 맡았더니 공유가 나오는 카누 광고의 씨즐sizzle 컷이 생각난다.
2.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의 유행이 블루보틀 다섯 시간 줄 서기 사태를 불렀다.
3. 핸드 드립 커피 시장이 성장하면서 인스턴트커피 시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4. 코피 루왁Kopi Luwak을 만드는 과정에 동물 학대가 있었다.
5. 커피 열매는 볶기 전에는 녹색이다.
사실 매일 마주하는 일상을 대충 지나치지 않고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메모하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하나의 소재를 두고 다각적으로 접근해 관찰하는 습관을 길러두는 것이 좋다.
관찰은 생각의 확장을 불러온다. 어떤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해 그 대상에 연결된 수많은 단어와 이미지로 퍼져나간다. 어쩌면 브레인스토밍의 시작이자 끝이 관찰 아닐까? 또 자세히 관찰하고 분석하다 보면 그 대상의 이면에 숨은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다양한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세잔이 사과에서 얻은 ‘유레카’처럼 말이다.
그래서 평소 뭐 하나에 빠졌을 때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을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 최근에는 덕후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퍼지면서 방송이나 유튜브는 물론 창업 시장에서도 덕후들이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덕후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높은 몰입도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단순한 관심사를 취미로, 취미를 전문가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류지민, 노승욱, 덕후 전성시대, <매경이코노미>, 2019년 6월 21일) 과연 무언가에 열렬히 빠져본 적있는 사람이 다른 일에서도 열정을 불태울 확률이 높다.
좋아하는 사자성어 중에 ‘불광불급 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미쳐야 미칠 수 있다. 어떤 일에 초집중해 한마디로 미친놈 소리를 들을 만큼 몰입해야 궁극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이유도 불광불급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무엇에 빠져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