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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기드문소년 Sep 07. 2015

오랜 벗에게

안정적인 삶에 관하여

부랄친구 여섯 명과 2박 3일로 속초엘 다녀왔다.

스무 살, 대학 입학 직후 '계'라는 걸 만들어서 모자란 용돈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2만원씩 매달 계비를 들이부은 것이 벌써 10년 째. 우리는 매해 여름마다 여행지를 정하고 곗돈 통장을 털어 전라도로, 강원도로, 부산으로 떠났다. 가까운 홍콩이나 대만, 그것도 힘들면 제주도라도 나가보자는 주장을 나 혼자서 줄기차게 하고는 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역시 10년 째.

올해는 속초였다.


여행은 재미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배낚시도 해보고, 이제는 아재가 되어 늘어진 뱃살을 부여잡고 해수욕도 신나게 하고, 옛날같지 않은 체력으로 인해 노는 시간 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예전처럼 신났다.


어디 사내놈들 여행에 술이 빠지겠는가. 5년 전만 해도 거기에는 '여자', '헌팅'이 필수적으로 끼어야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1년에 한 두번 볼까말까한 부랄친구들끼리 좋은데 가서 굳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랑 시시덕거릴 시간적, 물질적 여유는 이제 없다. 솔직히 체력적으로 부담이기도 하고….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 맥주, 양주, 죽통주를 깠다. 분명히 사온 술의 반도 못 마시고 쓰러져 잠들리란 것을 내심 알고는 있지만, 혹여나 술이 모자라면 어쩌나하는 불안감과 아쉬움에 다 먹지도 못할 술을 사고 말았다.

역시나 술이 좀 들어가니 배는 무거워지고 입은 가벼워진다. 이어지는 나와 친구놈들의 뻔한 사는 이야기. - 주로 일과 여자






생각보다 친구놈들은 정말 다양하게도 살고 있었다. 회사 때려치우고 다시 대학원 가서 공부하는 놈, 천신만고 끝에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막상 저녁 열시까지 야근하고 새벽 두시까지 회식하는 놈,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에서 빠방하게 연봉 받으며 4년 동안 다니고 있지만 정작 그 일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놈, 그리고 나처럼 목적의식 없이 사는 놈.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안동으로 전학을 오고나서 이 친구들을 처음 만났으니 우리의 인연은 벌써 올해로 20여 년이 다되어 간다.

그때는 우리 아부지가 돈 많이 벌고, 내 용돈의 많고 적음이 결단코 행복의 기준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반대항 축구 경기에서 내 포지션이 무엇인지, 기말고사 전체 석차가 올랐는지는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했다.


열 살에 처음 만났고, 20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된 우리.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을 하는지, 월급은 얼만지, 만나는 여자는 있는지... 이런 것 따위에 연연하며 살아간다.






10년 전, 그러니까 스무 살의 우리가 처음으로 갔던 여행지에서도 지금처럼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빨리 서른 살이 되고 싶어.


왜?



왜냐면 말이지... 그냥 서른이 되면 안정적일 것 같았다. 그때쯤이면 안정적인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고, 날 닮은 아들래미나 딸래미도 하나쯤 키우고 있을 것이며,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내 서재도 가지고, 서재에는 장서 1천권 쯤과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수백 종을 가지고 있을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서른이 된 지금.

나는 위에서 말한 것 중에 단 한 가지도 가진 게 없다.

이건 특별히 내가 못나서도 아니고 사회가 부조리한 탓도 아니다.

그냥 이 세상에 안정적인 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에게 들은 얘긴데 매 분기, 혹은 매해 실적평가를 한다고 한다. S급을 받으면 연봉 15% 인상, A급을 받으면 10% 인상, B급은 5%, C급은 동결.

그런데 간혹 평가를 못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뭘까?

그냥 잘린거란다. 만약 PDF 파일을 죽 훑어보다가 자기 이름이 없으면 그날부로 짐 싸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안정적이라고? 다 옛말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스케어크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얼음 위를 걷게 만든다. 얼음 위를 걷는 사람들은 어차피 물에 빠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얼음 위를 걸어간다.

요즘 나는 엄청나게 얇은 살얼음판을 한걸음 한걸음 떼어가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도 매일 같이.


서른이 되어서야 서른이 안정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른은 불안정하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마흔이 되든, 예순이 되든, 인생에서 자동으로 안정적이 되는 시기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제 아무리 원대하고 이상적인 꿈이라도,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안정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이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꿈을 안정적인 상태로 끌고가기 위해 오늘도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불안정한 인생을, 불확실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매일 불안에 떨겠지만 오늘보다 조금 더, 정말 개미 눈꼽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도 내 친구들은 발바닥에 땀나게 뛰고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다보면 언젠가 자신이 뛰어온 길을 뒤돌아 봤을 때, 그토록 꿈꾸던 안정적인 삶에 도달해 있을게다.


갑자기 예전에 한비야 씨가 <라디오스타>에 나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커서 앞으로 뭐가 될지 너무 기대되요!'

한비야도 자신이 뭐가 될지 모른다. 한비야 씨가 인생에 통달한 현자라는 말은 아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우리의 내일 모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정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기에.


서른이 되어 각자의 삶과 인생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부랄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면서도, 그들 각자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우리 존재 화이팅, 이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다.

진심으로 다들 원하는 바 이루면서 살 수 있길.

그러면서도 배는 곯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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