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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기드문소년 Aug 16. 2021

분노, 복수, 파멸

허먼 멜빌 <모비 딕>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 문장은 <모비 딕>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펼쳤을 때 맨 처음으로 등장하는 구절이다. <모비 딕>을 읽으면서 그보다 2천 년 가량 앞서 쓰여진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관통하는 주제는 각각 ‘분노’와 ‘고통’이다. 그리고 <모비 딕>은 인간의 힘으로 대적하기 힘든 자연적 존재(흰 고래)에 대항한 한 인간의 ‘분노’와 ‘고통’을 다루고 있다.


<Whalers> -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어렸을 적 <청소년용 백경>과 같은 제목의 문고판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기억 속의 그 책은 300페이지가 될까 말까 해서 손쉽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을 구입해서 마주하고 보니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어서 꽤 당황스러웠다. 책을 처음 펼쳐봤을 때는 한층 더 당혹스러워졌는데, 난데없이 여러 언어로 고래의 어원이 등장하는가 하면, 성경을 비롯하여 80권 정도되는 책에서 고래가 등장하는 부분을 발췌해서는 소설의 서두에 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서문 같지 않은 서문이자 발췌록을 헤쳐나오면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라는 유명한 구절로 소설은 본격적으로시작된다.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나, 이슈메일은 야만인 친구 퀴퀘그와 함께 에이해브 선장의 포경선 피쿼드 호에 선원으로 승선한다. 에이해브 선장은 바로 직전의 항해에서 포경업자들 사이에서 난폭하기로 악명을 떨치는 흰 고래 모비 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어서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었다. 피쿼드 호가 항구를 떠남과 동시에 에이해브 선장은 이번 항해의 목적이 모비 딕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천명을 하고, 그에 따라 에이해브와 그의 선원들은 모비 딕을 찾아 떠나는 것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Wave> - Ivan Aivazovsky


그러니까 실제로 내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이 책의 줄거리는 300페이지 남짓한 문고판으로 축약해도 될 정도로 매우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렇게 두꺼운 까닭은 소설 사이사이에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온갖 정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 챕터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다음 챕터에서는 고래의 머리, 몸통, 꼬리에 대한 정보 같은 것들이 서술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소설 후반부까지도 이 구조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심지어 줄거리 진행보다 고래학을 다루는 파트가 더 많다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고래 백과사전으로 불러도 과언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에야 구글링 몇 번이면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멜빌이 이 책을 쓴 18세기 미국에서는 책 자체를 접하는 것도 꽤 품이 드는 일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작가가 꽤나 고생해서 이 책을 썻으리라는 것을 쉬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인지 백과사전인지 모를 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읽어야하는 이유는 꽤나 명확하다. 그것은 <모비 딕>이 단순히 ‘고전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품격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문장 속에는 힘이 스며들어 있고, 수많은 인용구절들을 통해 다방면의 동서양 지식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작가정신’에서 출판된 판본이었는데, 이 책에는 총 411개의 각주가 달려있다. 성경의 일화와 그리스 신화, 힌두교 경전, 전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생소한 지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식의 결정체가 등장하기 때문에 멜빌의 방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The Sea of Ice> - Caspar David Friedich


주인공의 이름(혹은 주인공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었으면 하는 가명) ‘이슈메일’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몸종이었던 하갈의 몸에서 태어났기에 서자로 태어났다. 후에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이 태어나자 하갈과 이스마엘은 추방되어 방랑길에 오른다. 이런 사연 때문에 서구권에서 이스마엘은 추방자, 방랑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애이해브’는 구약성서 열왕기에 등장하여 폭정을 펼쳤던 왕인 아합의 영어식 발음이다. 미친 왕 아합과 같이 애이해브는 모비 딕에게 다리를 잃고 난 후 복수심에 미쳐버렸다. 그래서 자신이 파멸되는 한이 있더라도 모비 딕을 죽이고자 망망대해로 항해를 떠나고야 만다. 그가 탄 배 ‘피쿼드’라는 이름 역시 의미심장한데, 이 이름은 백인 식민지배자에 맞서 싸웠던 미국의 인디언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역사 속에서 피쿼드 부족은 백인들과 전쟁을 벌이지만 부족 자체가 깡그리 말살 당하다시피 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Monk by the Sea> - Caspar David Friedich


결국 이 책은 분노와 복수에 물든 한 인간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방관자의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슈메일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광기, 혹은 유색인종(피쿼드)을 지배하려는 백인(모비 딕)과의 싸움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문명에서 벗어나 바다로 도망쳤지만 그곳에는 또다른 잔혹함이 존재했고, 그곳에서도 그는 목격자로서 쓸쓸히 살아남는다.



허허,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먼 바다 끝에서 밀려 들어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뛰어넘어라!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관도, 관대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관대도 내 것일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 본문 중에서 애이해브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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