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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기드문소년 Aug 02. 2015

시간을 달리는 검은 옷의 소녀

로버트 네이선 <제니의 초상>

"내일이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일이란 대체 언제지, 제니?"
"그게 문젠가요?" 그녀는 물었다. "그건 항상이에요. 오늘은 내일이었어요 - 한 번은."


- 본문 중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북 큐레이터'라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어요.

여러 책들을 모아 놓고,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서 읽고 서평을 쓰는 모임입니다.

우선 공짜 책을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고요, 요즘에 새로 나오는 책들은 어떤게 있는지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지난 금요일에는 위와 같은 책들이 올라왔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들더군요.

보도자료들을 대충 훑어보고 책장을 휙휙 넘기고 있는데, 한 권의 책이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몇 글자 읽자마자 '이 소설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요.

이 책은 정말 훌륭해요. 아름답습니다.



『제니의 초상』의 작가는 로버트 네이선이에요.

사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작가인데요, 미국에서는 엄청 유명하신 분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제니의 초상』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한국에 번역된 그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Robert Nathan, 1894~1985


이벤 애덤즈는 뉴욕의 가난한 화가입니다.

누구도 그의 그림을 사려하지 않았고, 곧 그는 돈도 친구도 자존감도 잃어버렸죠.

절망에 빠져 뉴욕의 거리를 돌아다니다 이벤은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 소녀의 이름은 제니 에플턴.

그 소녀는 여러모로 신비했어요.

하지만 잠깐의 대화 후에, 만남과 마찬가지로 신비하게 그 소녀와 헤어지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돈이 궁해진 이벤은 미술상을 찾아가서 자신의 그림을 팔아보려고 합니다.

한숨을 쉬면서 이벤의 풍경화를 넘겨보던 미술상은 한 그림에 유난히 흥미를 보입니다.

그것은 일전에 만났던 소녀를 떠올리며 그 소녀의 얼굴을 대충 스케치한 그림이었어요.

미술상은 소녀의 그림을 25달러에 사들이죠.

그리고 그 소녀의 초상을 그려오기만 한다면 몇 점이 되었든 자신이 몽땅 다 사겠다고 말해요.



몇 주 뒤 이벤은 제니를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니는 몇 주 전에 비해서 많이 자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막 덧셈을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는 말을 하죠.



몇 달이 지나고 제니는 다시 이벤을 찾아옵니다.

그녀는 완전한 숙녀가 되어있었죠.

이벤은 제니를 모델로 세우고 그녀의 초상을 그립니다.



그 그림은 지금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황금빛 휘장 앞에 앉은 십대 초반 소녀의 그림입니다.

미술관에서는 <흑의의 소녀>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벤에게 그것은 언제나 한갓 제니일 뿐이죠.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 1872


우선 <흑의의 소녀>라는 그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저도 진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런 그림이 있나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흑의의 소녀>라는 그림은 안 나오더군요.

당연히 이벤 애덤즈라는 화가도 없구요.

그러니 저처럼 미련하게 <흑의의 소녀>, <검은 옷의 소녀>, <검은 옷을 입은 소녀> 등의 검색어를 입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된 1939년 作 <흑의의 소녀>를 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에두아르 마네 <벽에 기댄 베르트 모리조>, 1873


소설 속에서 이벤은 원래 풍경화를 그리던 사람이었어요.

시골의 풍경을 그렸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풍경화의 한계를 깨닫죠.

그는 현재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서 산업화, 현대화 되어 가는 중인 뉴욕의 모습을 그립니다.



제니는 과거에서 온 인물이에요.

그녀는 이벤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을 미래에서 기다려 달라고.

아이유의 <너랑 나>의 가사가 생각나네요.


너랑 나랑은 지금 안되지 시계를 더 보채고 싶지마아↗안↘ 네가 있던 미래에서 내 이름을 불러줘


현재를 그리는 화가와 과거에서 온 소녀.

구도가 재미있지 않나요?


이쯤에서 적절하게 등장하는 <검은 옷을 입은 우리 지은이>, 2015


다들 예상하시다시피 결국 이벤과 제니는 사랑에 빠집니다.

책의 홍보 문구가 이거에요.


시간과 세계가 교차하며 펼쳐지는 사랑의 신비와 본질을 환상적 수법으로 묘사한 로버트 네이선의 대표작


맞습니다.

헌데 전 이 소설을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이 소설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상대성, 시간의 영속성, 시간의 본질을 아주 심도있게 다루고 있어요.



사랑?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미술상 매튜스 씨처럼 얘기해 볼게요.

사랑은 흔해요. 어느 소설에서나 볼 수 있죠. 하지만 시간. 시간은 특별합니다. 흔치 않은 주제죠.



주인공의 직업이 화가라는 것도 아주 의미심장 합니다.

화가는 본디 순간의 것을 영원으로 남기는데 주력하는 직업이잖아요.

이벤은 과거의 존재를 현재에서 만나고, 작품으로 남김으로써 미래를 기억하죠.



로버트 네이선은 화가의 삶과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잘 묘사했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써의 동질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네요.


지오반니 볼디니 <검은 모자를 쓴 여자> ,1890


『제니의 초상』은 사랑과 인생에 대해 심도 깊은 고찰을 하면서도 그 분량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짧습니다.

160 페이지 남짓?

하지만 그 내용이 절대 가볍다는 생각은 들지 않죠.
그것은 아마도 사랑에 별달리 긴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에서 사랑은 그닥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사랑이죠.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뒤보세 부인의 초상>, 1807



"제가 자랄 때까지 선생님이 기다려주셨으면 해요."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진 않으실 테죠, 아마." 눈 깜짝할 새 소녀는 돌아섰다.

나는 소녀가 돌아서 가기 전에 내게 한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라나는 걸 기다려줄 수는 없다. 그들은 나란히 함께 자란다. 한 발, 한 발, 너나 없이 모두가 다 같이. 그들은 다 같이 어린애였고 또한 다 함께 노인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 함께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을 향해 사라져가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이 리뷰는 <책읽는지하철>의 북큐레이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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