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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천만 관객의 비밀> #열정

글 : 최광희 영화평론가 

<천만 관객의 비밀>저자




‘새옹지마’의 사전적 의미가 인생의 길, 흉, 화, 복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잖아요. 저는 쉽게 말해서 샐러리맨이 영화감독이 된 보기 드문 케이스인데, 당신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느냐 물어보면 꼭 한 마디를 해요. ‘새옹지마’라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새옹지마’의 사전적 의미가 인생의 길, 흉, 화, 복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잖아요. 

_윤제균, <해운대> <국제시장> 감독 

그냥 견디는 거죠. 결과적으로 데뷔할 때까지 10년이 걸렸는데, 10년이 걸릴 거라고 예상을 안 했죠. 하다 보니까 10년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만두거나 다른 길을 선택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거죠. 다른 갈 데도 없고. 그러니까 이걸로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고. 그리고 그 10년의 백수 생활이 창작의 어떤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_우민호, <내부자들> 감독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에서 10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기간이 그 정도인데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그보다 더 오래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막상 영화를 만들어도 그 작품이 흥행이 될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연간 100여 편의 한국영화 가운데 소위 흥행이라는 걸 한 작품은 불과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길고도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연출의 기회를 잡았어도 만약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흥행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그는 다시 한 번 기다림의 터널, 기다림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칩거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예전에 익숙했던 영화감독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경우엔 십중팔구 다음 기회를 노리며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지 못한 수천 명의 예비 영화감독들도 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중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한다. 하지만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아니, 많다.


여러분은 성과가 날지 안 날지 확실성이 막연하고 불투명한 프로젝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본 적이 있는가? 1년? 2년?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멀리 보고 나아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기다림은 숙명일지도 모른다.


열정은 샘솟는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열정을 가다듬으면서 우리 스스로 익어갈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기다림, 사람이 익어가는 시간 


2015년 말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은 한국영화사에 상당히 의미 있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로는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낸 것이다. 동원 관객 수는 사실상의 감독판이라고 할 수 있는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 모은 208만 명까지 합쳐 총 915만 명이다. 지난 2001년 800만 명을 동원했던 〈친구〉라는 작품의 기록을 무려 15년 만에 경신한 것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로 900만 명을 넘겼다는 것은 15세 이상 관람가나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가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것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계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600만 명을 넘어서면 대략 천만 명을 동원한 흥행 성적과 동일시한다. 그만큼 〈내부자들〉이 만들어낸 흥행 기록은 하나의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그전까지는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영화감독이었다. 이전에 만든 두 편의 영화가 있긴 했지만 모두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민호 감독이 장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2010년 작인 김명민 주연의 〈파괴된 사나이〉였다. 그때 그는 이미 불혹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른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화감독 준비생으로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민호 감독은 과연 그때까지 뭘 하면서 지냈을까?



 우민호가 10년의 기다림을 견딘 비결 


최광희│감독님이 2000년에 단편을 내시고 〈파괴된 사나이〉가 데뷔작이셨으니까 그때까지 10여 년 시간이 흘렀어요. 그사이에 어떻게 먹고사셨습니까? 
우민호│그냥 백수였죠. 백수니까 부모님이 뒷바라지 다 해주셨죠. 허허. 그런 거죠, 뭐. 구체적인 벌이는 없었어요. 
최광희│벌이 자체가 없었으니 사실상 실업자잖아요. 이른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실업자’. 
우민호│한 10여 년 동안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못했던거죠. 
최광희│열정을 가지라는 말은 많이들 하는데, 말이 쉽지 사실 데뷔를 못 한 상태에서 10년 넘게 기다리는 상황이면 그 열정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 식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민호│당연히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이 생기죠. 하지만 그걸 좋은 쪽으로, 좋은 에너지로 가져가려고 노력했어요. 반드시 보여주고 말리라!

최광희│일종의 독기 같은 게 생기는 건가요? 
우민호│그런 거 생기죠. 그래서 감독들이 성질이 더럽잖아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런 일을 겪다 보니까 나중에 영화가 잘되더라도 그런 습성이 몸에 배어 있는 거예요. 정신 상태도 그렇고. 

최광희│‘나는 이게 전부다. 너희들 못 따라오면 안 된다. 나한테는 전부니까.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 그런 마음이라고 봐야 할까요? 
우민호│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제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영화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이지 전부라고 생각하는 순간 힘들어지더라고요. 주변의 친구들도 떠나고, 사랑하는 여자도 떠나고, 뭔가가 다 안 돼요. 영화는 그냥 인생의 한 부분일 뿐,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 아닐까요?
영화는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거지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더 편해졌어요. 가령 영화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방해 요소가 된다, 그럼 과감하게 안 찍는 게 맞겠죠. 물론 그 고통을 매개 삼아 창작하시는 분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_우민호, 〈내부자들〉 감독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독기를 품는 한편, 그 독기를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영화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관조적 태도를 갖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그가 익어가는 과정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영화 〈내부자들〉이라는 활화산으로 폭발하게 된 것은 아닐까?




글 : 최광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뉴스전문채널 YTN에서 방송 기자로 일했다. 2001년 창간한 영화주간지 〈FILM 2.0〉의 취재팀장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FILM 2.0〉에서 주로 흥행 분석과 영화 산업 관련 기사를 많이 쓰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흥행의 함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이번 책 『천만 관객의 비밀』의 자양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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