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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푼 Jan 28. 2023

누구나 겨울을 앓는다

*영화 <러브레터> (1995)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계절이 붙잡고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텍스트든 취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 시기와 텍스트가 일치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들. ‘그대여, 그대여’(1)라는 노랫말과 멜로디는 꽃이 필 때 쯤이어야 화사해지고, 진한 습기를 머금은 햇빛이 내리쬐야 세나와 미나미의 아옹다옹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서늘한 바람에 윗옷을 걸치게 될 때 쯤에 다시 들춰보게 되는 책들도 몇 권 있다. 그러다 모든 나무의 모든 이파리가 떨어지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 밖이 새하얗게 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오면 버릇처럼 찾게 되는 영화가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1995)다.


  이와이 슌지 감독 작품 특유의 빛을 활용한 연출과 영상미,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는 음악도 훌륭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에 있다. 우연히 주고 받게 되는 편지를 통해 진행되는 히로코와 현재의 이츠키, 그리고 과거의 이츠키‘들’의 이야기는 다채롭지만 복잡하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에 짓는, 많은 것이 담긴 현재의 이츠키의 표정이 주는 여운이 너무 길어서인지 10년이 넘도록 매해 때가 될 때마다 곱씹고 있다.


  영화의 현재 배경이 겨울이라는 점도 있지만, 매 겨울마다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화면마저 새하얗게 뒤덮은 ‘눈(雪)’ 때문일 것이다. 설산에서 안부인사를 외치는 유명한 장면이 보여주듯, 눈은 <러브레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히로코에게 눈은 과거 그 자체다.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이자 원망이다. 너무 두텁게 쌓여버린 바람에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반면 현재의 이츠키에게 눈은 현재의 삶이다. 트라우마처럼 남은 어느 겨울에 시간이 멈춰버려, 눈으로 그때의 기억을 파묻어버렸다. 편지를 계기로 파편을 하나씩 꺼내어 보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외면해버린다. 둘 다 저마다의 겨울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봄은 오고, 눈은 녹는다. 영화의 종반, 히로코는 현재의 이츠키로부터 받은 과거의 연인에 대한 추억들을 되돌려줌으로써 현재로 나아가려고 한다. 현재의 이츠키는 부친의 죽음을 제대로 마주볼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천천히 기억해내고 있던 그 시절, 그사람에 대한 감정을 깨닫게 된다. 히로코와 이츠키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그리고 각자가 이어나가고 있던 일상을 통해 내면에 쌓여 있던 눈이 조금씩 녹아내린 것이다.


  실제의 계절과는 상관없이, 눈보라가 치는 한 겨울의 어느 날 같은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다. 차마 정리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나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불안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생활의 버거움이 조용히 쌓인다. 우산을 써 보고 틈틈이 쓸어봐도 마침내는 두텁게 쌓이고 마는 눈 처럼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 <러브레터>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두 사람의 겨울을 담담히 지켜보는 방식으로 보는 이에게 위로를 전한다.


  누구나 겨울을 앓는다. 그럼에도 눈은 녹는다. 봄은 온다.


2021년 1월


(1) 버스커 버스커, <벚꽃엔딩> (2012)

(2) 후지TV, <롱 베케이션(ロングバケーション)>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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