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카페 가서 커피 좀 사갈게!]
승태가 홍대입구역에 도착해 이제 막 개찰구를 통과했을 때 다정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마 다정이 먼저 도착한 듯 보였다. 승태는 얼른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6번 출구 쪽으로 향했다. 주말의 홍대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역을 빠져 나가는 것조차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홍대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니나 싶었다.
6번 출구 밖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가을의 끝과 겨울의 시작 사이가 되자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지각색이었다. 아직은 너무 이르지 않나 싶은 패딩도 보였고 저건 좀 춥지 않나 싶은 얇은 셔츠 차림도 있었다. 승태는 괜히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얇은 니트와 캐주얼 자켓을 대충 정돈해 두고 괜한 긴장감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초겨울의 바람이 살랑 불어와 승태의 자켓을 살짝 헝클었다.
“뭐야. 웬일로 깔끔하게 입었네?”
한 손에 커피를 든 다정이 승태의 뒤에서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놀란 승태가 뒤로 돌아 보니 긴 트렌치 코트에 니트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다정이 눈에 들어왔다.
“뭘 그렇게 놀라?”
“뒤에서 그렇게 오는데 어떻게 안 놀라냐? 나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뒷모습만 딱 봐도 너구만 뭔 소리야. 이거나 좀 들어봐.”
다정은 자연스럽게 승태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네고는 신발을 고쳐 신었다. 그러고는 승태가 손에 쥐고 있던 커피 빨대에 입을 대고 한입 먹은 뒤 다시 커피를 받아 들었다. 다정과 승태는 6번 출구를 뒤로하고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근데 서강대역에서 내려도 되지 않아? 왜 홍대입구역으로 오라고 했어?”
“아, 그냥. 걸어가면 좋잖아. 날씨도 좋고.”
“이제 겨울이야 승태야. 정신 좀 차려.”
“나도 알아. 그래도 오늘 그렇게 춥진 않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 길 좀 추억이네.”
이 근처에서 대학을 같이 다니다 보니 다정과 승태에게는 특히 경의선 숲길에 대한 추억이 유독 많았다. 승태는 걷는 걸 워낙 좋아하는 탓에 혼자서 종종 경의선 숲길에 산책을 다니곤 했는데 그걸 안 다정이 같이 가보겠다며 나섰던 적도 있었다. 물론 다정이 도중에 다리가 아프다며 금방 포기하고 근처에 술을 마시러 가긴 했지만 다정도 이 길에서 보는 풍경들 만큼은 좋아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주변 가게들은 많이 바뀌었고 디테일한 구석들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 풍경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근데 요즘 뭐가 그렇게 바빴어?”
“하… 이 얘기 하려면 진짜 한도 끝도 없어. 이따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
다정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은 회사 일 따위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예쁜 풍경을 보면서 힐링이나 해야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승태도 그런 다정을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단풍이 잔뜩 물든 나무들이 경의선 숲길을 수놓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저 단풍에 구름이 몇 점 걸려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파란 하늘에 단풍이 걸려있는 모양새였다. 승태는 그 마저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 여기 있던 카페 없어졌네?”
한참 걷던 다정이 갑작스레 멈춰 서더니 텅 비어 있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양 옆에 사람들이 가득한 가게들 덕에 텅 빈 건물에 공허함이 한층 더 도드라졌다.
“그러네. 너 그 카페 진짜 좋아하지 않았어?”
“맞아. 원래 아메리카노만 마셨었는데 그 카페 때문에 카페라떼만 마시게 됐잖아. 여기 진짜 맛있었는데… 분위기도 좋았고.”
“확실히 이 주변이 많이 변하긴 했다.”
승태의 말을 들은 다정은 손에 든 카페라떼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생각에 빠졌다. 이 주변이 이렇게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승태와 함께 있었구나 싶었다. 승태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다정을 잠시 바라보았다. 평소였으면 이런 저런 얘기를 잔뜩 했을 다정이었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조용한 걸 보니 그 동안 정말 힘들었구나 싶었다.
“근데 왜 단풍 보러 여기 오자고 했어?”
“다른 데는 사람도 너무 많을 것 같고 해서. 그래도 옛날 생각도 나고 좋지 않아?”
“좋긴 한데 단풍 구경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하지 않냐는 거지 내 말은.”
“그런가? 그냥 서울숲이나 뭐 그런런 데로 갈걸 그랬나?”
“아냐. 네가 생각해온 게 그렇지 뭐.”
“나 너랑 싸우자고 부른 거 아니다.”
승태의 반응에 다정은 헤헤 하고 웃으며 벤치에 앉았다. 서강대역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 단풍길에 놓인 경의선 철길이 한층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 앉아 다정과 티격태격 하면서도 다정의 웃는 모습을 보니 승태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해가 짧아진 게 체감이 될 정도로 빠르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노을이 하늘을 뒤덮었지만 더 붉은 단풍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 동안 주말에 집에서 푹 쉬었던 다정이었지만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이제야 제대로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은 뭐 먹지?”
“삼겹살 먹으러 갈래? 우리 자주 가던 집 있잖아.”
“아, 알지. 거기 또 된장이 진짜 기가 막힌데.”
“생각하니까 너무 배고파…”
다정은 마시던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쭈욱 마시고는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해는 노을만 남기고 이미 서쪽 하늘에서 사라졌고 저녁이 되었음을 알리며 켜진 가로등이 단풍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적당한 황혼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