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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Oct 05.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10

“이모 안녕하세요!”

“어머, 승태 왔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

“일 하느라 바빠서 그렇죠 뭐… 잘 지내셨죠?”

“나도 이제 많이 늙었지 뭐. 다정이도 같이 왔네?”

“안녕하세요. 이모는 그대로이신데요?”

“아유, 괜히 그런다. 뭐 줄까?”

“저희 냉삼 2인분이랑 소주 하나 주세요. 된장도 먼저 주시구요!”

“그래그래, 앉아 있어. 금방 갖다 줄게.”


승태와 다정은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옛스러운 갈색 벽지와 생활기스가 가득한 원형 식탁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다른 가게들은 다 변해도 여기 만큼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딱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구수한 삼겹살 냄새와 된장 냄새가 섞여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모는 늙었다는 이모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학교 새내기 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친근하셨다.


“여기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그니까. 이모는 진짜 볼 때마다 너무 웃겨.”

“내가 웃겨? 어디가 그렇게 웃겨?”


이모는 정말 빠른 속도로 큰 쟁반에 밑반찬들을 담아와 능숙하게 세팅해주셨다. 다정과 승태는 순간 놀랐다가 이모 여전히 예쁘시다며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이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곧바로 삼겹살을 꺼내 오시더니 정성스럽게 구워주셨다. 예전에는 직접 구워서 먹었었는데 이모가 다정과 승태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 때쯤부터는 아들, 딸 같다며 손수 구워주셨다. 다정과 승태가 매번 ‘저희가 구워도 된다’고 말씀 드리지만 이모는 결코 집게를 뺏기지 않으셨다.

삼겹살을 먹고 술을 마시는 동안 다정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출고부 신입이 친 사고와 끊임 없이 이어지는 문의 전화,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원래 업무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치열했던 날들을 쭉 늘어놓았다. 한번 치일 때마다 소주를 한 잔씩 먹으니 술도 고기도 금세 비워졌다.


“진짜 내가 이 술을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진짜 고생 많았겠다. 누가 보면 그 회사 일은 네가 다 한 줄 알 거야.”

“내 말이. 근데 진짜 다 같이 너무 고생을 해서 할 말이 없어.”


다정은 마지막 남아 있던 소주를 마시고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일어났다. 승태도 뒤따라 일어나서 먼저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로 향했다.


“맛있게 먹었어? 아유 자주 좀 오고 그래.”

“네 이모, 자주 올게요.”

“그래그래.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 너희가 한창 학교 다닐 때는 고기며 술이며 남아나는 날이 없었는데 다들 요즘은 술을 잘 안 먹어.”

“진짜요? 이상한 일이네.”

“그래도 오랜만에 너희 이렇게 보니까 좋네. 다 컸어 내 새끼들.”


이모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승태의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해주셨다. 때마침 화장실을 다녀온 다정도 들어와 짐을 챙겨 나가며 이모에게 또 오겠다며 인사를 드렸다. 이모는 들어올 때와 같이 밝은 표정으로 다정과 승태를 배웅해주셨다.

고깃집에 들어섰을 때보다 한껏 차가워진 바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승태와 다정은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다. 모둠 어묵의 따뜻한 국물과 떡볶이가 삼겹살로 인해 기름진 입과 위장을 쓸어 내려주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확실히 고깃집 보다 조명도 어둡고 조용하다 보니 술과 서로에게 더 신경이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저번에 했던 얘기 있잖아.”

“뭐?”

“나한테 너 좋아햐나고 물었던 거.”


다정은 잡고 있던 소주 잔을 순간 놓칠 뻔했다. 이 얘기 하려고 부른 건가. 순간적으로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렇게 빨리 이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든 둘러대서 다른 얘기로 돌려야 하나?


“그냥 그때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거야. 잊어버려.”

“그래?”


승태는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동안 고민하고 고민했던 말이었는데. 승태는 이 얘기를 꺼낼까 말까 계속 고민했었는데 뭔가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잔을 내려두고 떡볶이를 한 조각 집어 천천히 곱씹었다. 그때 다정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 한창 회사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고민이 되게 많았던 때라 좀 기댈 데가 필요했었어.”

“그래, 뭐 그럴 수는 있지.”

“설마 내가 그 얘기 했다고 요 몇 달 계속 그거 생각하고 있었어? 아이구, 우리 승태 누나 걱정했어요?”

“뭐래.”


다정은 당당하면서도 유쾌하게 지금의 상황을 풀어나가 보려 했다. 그러나 승태의 표정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기분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저 표정은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순간 취했나 하고 생각해봤지만 고깃집에서 3병, 2차 와서 아직 첫 병이니까 그렇게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너 좋아하는 거 맞나 봐.”


잔을 다시 채우고 병을 내려놓은 승태가 다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정은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뭐라고?”

“너 좋아한다고.”

“야, 그때는 내가 그냥 취해서 그랬던…”

“좋아하는 거 맞아.”


다정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빈 잔에 술을 채우는 것도, 식어가는 떡볶이와 모둠 어묵을 휘저을 수도 없었다. 멈춰 있던 시간이 아직 흐르지 않는 듯했다. 지금 기분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든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승태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다정을 보며 채워 두었던 소주잔을 비웠다. 영겁과도 같은 공백이 이어지던 순간 그 공백을 깬건 다정이었다.


“…사귀자는 거야?”

“음…”


승태는 다정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렸다. 8년 동안 친구로 지냈던 다정과 어떤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다정을 좋아하는 마음이 단순히 친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승태의 그 물음들은 짧은 시간 승태의 머릿속에서 회오리 치다 빠르게 빠져나갔다.


“응. 나랑 사귈래?”


다정의 눈은 순간적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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