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야?”
다정은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승태를 바라보며 물었다. 승태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다정은 그 눈빛을 통해 승태가 지금 진심임을 이미 눈치챌 수 있었다. 다정은 점점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우리가 너무 오래 친구로 지냈다는 거 알아. 너랑 함께하면서 설렜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고 아직도 가끔 나는 그날들이 떠올라. 그리고…”
승태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을 이어가다가 잠시 멈추더니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다정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마무리지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너랑 설레고 싶어.”
다정은 순간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해볼까 고민했다. 승태가 말한 분명 다정 또한 설레는 순간들이 있었고 승태가 좋다. 그러나 8년 동안 친구로 지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이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지 고민되었다. 물론 사실상 지난 술자리에서 다정이 먼저 고백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긴 했다. 다정이 애초에 자신을 좋아하는 거냐고 묻지만 않았어도 승태가 이런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승태가 자신을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승태는 그런 다정의 표정을 읽었는지 자연스럽게 물병을 들어 다정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다정은 승태가 따르는 물이 자신의 잔을 천천히 채우는 찰나의 시간 동안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였고 습관적으로 엄지와 검지 손톱을 똑딱거렸다. 그리고 이내 결심을 한듯 나긋한 목소리로 승태에게 말했다.
“그래, 좋아.”
물을 다 따랐을 때쯤 승태는 다정의 대답을 듣고 놀라며 다정을 바라봤다. 물통이 다정의 물잔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승태는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다정은 그런 승태를 보고 쑥쓰러운지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승태라면 괜찮아.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친구로 잘 지냈는데. 나도 승태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 그런 다정의 생각이 테이블 위 술잔과 모둠 어묵, 떡볶이에 베어들었다.
“짠… 할까?”
승태는 남은 막잔을 서로의 잔에 가득 채우고 둘은 이 연애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듯 잔을 부딪혔다. 맞부딪힌 두 잔에서는 맑고 청량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다정이 먼저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고 있었다. 승태는 결제 완료를 기다리는 다정의 옆에 서서 머리를 쓰다듬어도 될까 안 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빠르게 결제가 끝났고 다정은 카드를 받아 가게 밖으로 나갔다. 승태도 괜히 멋쩍어 하며 다정의 뒤를 따랐다.
겨울이 깊어감이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승태와 다정은 전철역을 향해 말없이 걸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원래 고백 받고 나면 이렇게 어색했던가?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그래도 그 어색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찬바람을 맞으며 술도 좀 깨고 정신도 좀 차렸는지 다정이 승태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런 달달한 말도 할 줄 알았어?”
“뭐, 뭐래. 뭐가.”
“아니야. 이제 보니 좀 귀엽네.”
“그만 좀 놀려.”
“생각해 볼게! 어? 우리 붕어빵 먹고 가자!”
다정은 앞에 보이는 붕어빵 포장마차를 향해 총총거리며 걸어갔다. 승태는 다정의 귀엽다는 그 말에 괜히 쑥쓰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아져 빠르게 다정을 따라갔다. 포장마차 안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잘 익은 붕어빵을 뒤적거리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저희 붕어빵 2천 원어치 주세요! 팥이랑 슈크림 섞어서요!”
“그려그려, 조금만 기다려잉.”
할머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봉투를 펼쳐 붕어빵을 하나씩 담아주셨다. 다정의 얼굴에는 기대와 기쁨이 동시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 승태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할머니께 드렸고 다정은 할머니로부터 붕어빵을 받아 들었다.
“너 팥 먹을 거야, 슈크림 먹을 거야?”
“둘 다 먹을 건데? 4개씩이니까 2개씩 나눠 먹으면 되잖아.”
“난 슈크림이 더 좋은데…”
“어휴 그럼 네가 슈크림 3개 먹어. 설마 혼자서 슈크림만 다 먹을 생각은 아니었지?”
“난 네가 팥 좋아한다고 하길래~”
“그런 적 없어. 얼른 슈크림 하나 줘.”
다정은 승태의 말에 마지 못해 슈크림을 두 개 꺼내 하나를 승태에게 건네고 나머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달달한 슈크림이 붕어빵의 온기와 함께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승태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다정을 보며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는 다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정의 길고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이 승태의 손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다정은 그런 승태를 보며 붕어빵 첫 입을 먹었을 때만큼 환한 미소를 한 번 더 지어 보였다.
전철을 타고 다정과 승태는 다정이네 집 앞까지 왔지만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집 근처 공원으로 가 아까 산 붕어빵을 나눠 먹었다. 어떻게 보면 연애하기 전과 별 다를 게 없다 싶다가도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는 걸 보니 사귀는 게 맞긴 맞구나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너 자취한 지 얼마나 됐지?”
“나? 이제 한 1년쯤 됐지.”
승태는 붕어빵을 다 먹은 봉투를 접으며 다정에게 물었다.
“자취하면 안 심심해? 서울이 본가니까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 해도 되잖아.”
“우리 집에서 회사 너무 멀어.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데 난 그렇게 일찍 일어날 생각이 없어.”
“하긴 그렇긴 하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그럼! 엄마가 거의 매주 반찬 갖다 줘서 냉장고가 마를 날이 없어 아주.”
“그래? 그럼 나중에 반찬 좀 뺏어 먹으러 와야겠다.”
“종종 먹으러 와. 우리 엄마 반찬 먹어보면 빨리 장가와야겠다고 할 수도 있어.”
“우리 오늘 1일인데 벌써 아들 딸까지 보는 거야?”
“아 뭐래!”
다정이 장난스럽게 승태의 가슴을 팍 쳤다. 별 다른 의미도 없고 그냥 장난스럽게 주고 받는 대화이지만 승태는 ‘이런게 소소한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정을 바라봤다. 다정의 표정을 보니 다정 역시 승태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제 들어가. 너 감기 걸리겠다.”
다정이 일어나며 승태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승태의 손에 남아 있던 온기가 다정의 손을 타고 넘어왔다. 승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다정은 너도 얼른 들어가라며 승태의 등을 떠밀었다.
“집 도착하면 연락 할게.”
“응. 나도 씻고 연락 할게.”
“그래, 나 간다!”
승태는 다정의 머리를 다시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는 길에도 다정의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맞잡은 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는 겨울의 초입이었지만 다정과 승태 사이에는 은은하게 따뜻함과 설렘이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