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씨 오늘 퇴근하고 뭐해?”
“네? 무슨 일 있으세요?”
퇴근 한 시간 전, 이제 막 하루 업무를 마무리하려던 다정에게 한 대리가 와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한 대리는 지난 번 있었던 출고 이슈 때문에 퇴사를 하네 마네, 그 신입을 찢으러 가네 마네 하더니 결국은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겨우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이래서 같은 회사 사람이 나간다는 말은 반은 믿고 반은 믿지 말라는 말이 생기는구나 하고 다정은 생각했다.
“아니 오늘 마침 금요일이기도 하고. 동지잖아.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하려 했지.”
“대리님 그런 것도 챙기세요? 의외네요.”
“어머 다정 씨, 지금 나 나이 먹었다고 그러는 거지?”
“에이 설마요. 저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시는데. 헤헤. 그냥 생각보다 그런 거 챙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신기해서요.”
“그래? 또 누가 챙겨?”
“네. 남자친구가 오늘 동지라고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더라구요.”
“엥? 다정 씨 언제 남자친구가 다 생겼어?”
“그렇게 됐어요. 헤헤. 어머 퇴근 시간이다! 대리님 저 먼저 가요! 고생하셨습니다!”
“남자친구 누군데! 얘기는 해주고 가야지!”
다정은 절규하듯 소리치는 한 대리를 뒤로 하고 총알 같이 빠른 속도로 회사를 빠져 나와 전철에 몸을 실었다. 승태에게 칼퇴하고 날아서 전철에 탔다고 메시지를 보내니 ‘나도! 곧 도착할 것 같아.’ 하며 빠른 답장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휴일이나 명절, 또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처럼 대중적인 기념일들만 신경 쓰지 절기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24절기는 날짜가 특정 되어 있지 않고 월초와 월말에 모여있다 보니 매년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 승태에게 동지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했던 건 24절기가 음력 날짜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워낙 음력을 기준으로 날짜를 세다 보니 절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승태는 동지 얘기를 굳이 하면서 팥죽 먹긴 좀 그러니 그냥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제 와서 사실 우리에게 그런 핑계가 필요하진 않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이유 없이 불러내는 게 어색한 승태가 괜히 귀엽다고 생각한 다정이었다.
“박승태!!”
전철역을 빠져나온 다정은 역 앞 정류장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있는 승태를 크게 부르며 달려갔다. 승태는 그런 다정을 보더니 튕기듯 몸을 일으켜 달려오는 다정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코트가 제법 두툼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다정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왔어? 야 근데 넌 아직도 박승태가 뭐냐?”
“헤헤 넘어가 넘어가. 뭘 그런 걸로 삐지고 그러냐!”
“안 삐졌거든. 배고프지?”
승태는 다정의 손을 잡고 코트 안으로 넣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정은 종종걸음으로 승태의 손을 꼭 잡고 옆에 딱 붙어 따라갔다. 겨울 바람이 살랑 하고 불었지만 둘은 그런 바람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한기를 이겨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다정과 승태는 구석 자리에 앉아 키오스크로 통오징어 떡볶이와 에이드를 주문했다. 순간적으로 주류 메뉴에 눈길이 갔다가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오늘은 술을 먹지 말자는 승태의 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에이드로 눈을 돌렸다. 승태는 능숙하게 냅킨과 수저를 세팅해줬고 다정은 물을 따라주었다.
“근데 동지라면서 왜 메뉴는 떡볶이야?”
“동지에는 붉은 팥으로 쑨 팥죽을 먹는다잖아. 떡볶이도 빨간색이니까 같은 맥락 아냐?”
“뭐야 그게! 어이없어.”
어쩐지 승태가 떡볶이를 먹자고 하더라니, 그런 이유였나 싶어 다정은 웃음이 터졌다. 승태는 깔깔대며 웃는 다정을 보며 자기는 당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다정은 그 표정이 너무 웃겨 오히려 더 웃음이 나왔다.
잠시 뒤 에이드와 떡볶이가 나왔다. 승태는 집게와 가위를 들고 먹기 좋은 크기로 떡볶이와 오징어를 잘라주었다. 사뭇 진지하게 자르는 모습을 다정은 흐뭇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떡볶이는 적당한 걸쭉함과 달콤함이 매콤함과 어우러져 아주 맛있었고 떡의 쫄깃함도 딱 적당했다.
“요즘 회사 사람들이 자꾸 연애하냐고 물어봐서 죽겠어.”
승태가 떡볶이를 먹으며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나도 오늘 우리 대리님한테 연애한다고 하고 도망치듯 나왔어. 한 대리님한테 붙잡혔으면 아마 나 지금까지도 못왔을걸?”
“그래? 난 그정돈 아니긴 한데 내가 연애하는게 다들 신기한가봐.”
“얼마 전에 혁준이 만났을 때도 그랬잖아. 거의 너 죽일 기세던데?”
“아니 뭐 혁준이가 그러는 건 이해가 가는데 회사 사람들은 나랑 평소에 말도 잘 안하는데…”
“원래 사람들 남일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많잖아. 그냥 신경 꺼.”
승태는 얼마 전 혁준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그냥 신경 끄라는 다정의 말에 괜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참, 우리 크리스마스 때는 뭐할거야?”
다정이 슬슬 배가 부른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고민을 좀 했는데. 그냥 우리 집에서 놀래? 너 사람 많은 곳 별로 안 좋아 하잖아.”
“그렇긴 한데… 집에서 뭐하게?”
“글쎄… 영화 틀어놓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보면 딱 좋지 않을까? 술도 한잔 하구.”
“그것도 좋긴 한데… 뭔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좀 느껴보고 싶어!”
승태의 말대로 다정은 사람이 많은 곳은 가급적 피하고 싶어 한다. 여러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도 싫고 예약을 못하면 어디 식당 하나, 카페 하나도 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처럼 승태와 처음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조금 앞섰다.
“그래?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그렇다기 보단… 음… 그냥 크리스마스 장식이 구경하고 싶어.”
“귀엽네. 그럼 어디 산책이라도 좀 다녀왔다가 집에서 맛있는 거 해 먹을까?
“좋아! 어디 갈지는 내가 찾아볼게.”
한창 얘기를 하다 보니 떡볶이도 이제 거의 바닥을 보였다. 떡볶이 국물은 인덕션의 미열에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끓고 있는 게 떡볶이 국물인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인지, 앞에 앉아 있는 서로에 대한 애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함께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사실이었다.
계산을 하고 밖에 나와보니 이미 길거리에는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는 승태에게 한눈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디선가 캐롤도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새까만 겨울 밤하늘이었지만 장식 덕분인지 환하다고 느껴졌다. 다정은 승태에게 살며시 팔짱을 끼며 승태의 코트 안으로 아까처럼 손을 넣었다. 승태는 갑자기 손이 들어왔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정의 손을 따뜻하게 깍지 껴 주었다. 다정은 그런 승태의 온기가 느껴져 승태에게 살짝 기대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