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지. 오늘 나 괜찮나? 아니, 지금 괜찮나? 이래도 되나? 다정의 머리속에 온갖 생각들이 빛보다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런 찰나의 순간에 의외로 먼저 손을 멈춘 건 승태였다. 다정은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로 꿈뻑꿈뻑 승태를 바라봤다. 승태는 그저 다정을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뭐, 이렇게라도 할까봐?”
얄미운 듯 다정한 승태의 목소리가 다정의 마음을 진정시켜줬다. 그렇게 점점 호흡이 안정되자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든 다정이었다. 막상 하려던 걸 안 하니 왠지 모르게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어, 진짜.”
다정은 그대로 승태의 품에 폭 안겨 다시 들리기 시작한 영화 소리에 집중했다. 어느새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안아주던 승태는 어느새 다정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정의 검지 손가락을 쓰다듬어 주던 승태의 엄지 손가락에 다정도 조심스럽게 엄지 손가락을 살며시 포개었다.
“이러고 있기만 해도 너무 좋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올 때 승태는 나지막이 말했다. 다정은 대답 대신 승태의 팔에 더욱 안겼다. 승태의 말대로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지금 이 순간 그 자체로 너무 행복한 크리스마스였다. 적당한 취기와 마음 따뜻해지는 로맨스 영화, 자신을 안아주는 승태의 온기와 손가락을 쓰다듬어 주던 다정함,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새해 첫날도 같이 보낼까?”
“너 매년 연말에는 항상 부산 내려가잖아.”
“그렇긴 한데 이번 새해는 너랑 맞이하고 싶어서.”
“나야 좋은데… 집에는 뭐라고 얘기하게?”
“여자친구랑 보내기로 했다고 하면 되지. 우리 엄마는 오히려 좋아할 걸?”
“히히 그런가? 그럼 나 나중에 막 너희 집에 인사도 드리러 가고 해야 하는 건가?”
“때가 되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다정은 승태의 말에 생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릇을 정리하면서도 승태의 말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얘기는 승태가 다정과의 미래를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집안 인사니, 결혼이니 하는 게 실감이 나지도 않고 사실 당장 그렇게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냥 우리의 이 관계가 오랫동안 이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는 승태가 좋았다.
“대충 치워 둬. 내일 아침에 내가 치울게.”
“이거까지만 할게.”
“안 해도 되는데.”
“괜찮아. 얼마 안되는데 뭐.”
다정은 음식물을 한데 모아 버리고 싱크대에 그릇을 쌓아 다음날 설거지 하기 쉽도록 물도 받아두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자고 간다고 할까. 지난 8년 동안 봐왔던 친구 승태라면 그냥 자고 가라고 했을 것이다. 같은 방에서 잔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친구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아까 승태가 했던 그건… 아니야 그건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올해 마지막 날에도 같이 있을 거니까.
“이정도면 됐겠지? 슬슬 가야겠다.”
“벌써 가려구? 안 자고 가게?”
“그럴까 싶기도 했는데 너 연말에 부산 안 내려 간다며. 그때 같이 있자.”
“지금도 같이 있고 싶은데…”
승태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다정은 쪼르르 달려가 승태를 안아주고는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대신 마지막 날에 누나 집에 와. 그땐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진짜? 뭐해줄 건데?”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줘.”
“좋아! 완전 어려운 거 해달라고 할거야.”
“그래 막 어려운 거 얘기해봐. 만들어 주긴 할게. 그게 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니야. 간단한 걸로 먹자… 헤헤…”
나란히 오가는 장난 속에 승태와 다정은 연말을 함께 보낼 계획을 어렴풋하게 잡았다. 다정은 굳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승태를 겨우겨우 말리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는 아직 크리스마스를 잔뜩 만끽하고 있는 커플들과 찬란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보였다. 그것들을 보면서 다정도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
올해의 마지막 평일. 작년 이맘때 승태는 너무 바빠서 정신 없이 보냈는데 올해는 이상하리 만치 일처리가 수월했다. 한해 동안의 업무들을 정리하고 내년에 새롭게 출시될 상품들에 대한 플랜도, 올해 판매가 좋았던 상품들에 대한 피드백도 모두 완벽하게 정리했다. 심지어 팀장도 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점심을 먹는 내내 기분이 좋았던 승태였다.
“승태 씨 이번에도 부산 내려가겠네?”
점심을 먹고 커피를 홀짝이던 김 주임이 다가와 물었다. 승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뇨? 올해는 여자친구랑 보내려구요.”
“뭐? 저번에 그 친구랑 잘됐나 보네?”
“네 뭐. 그렇게 됐어요.”
“것봐, 내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그러게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 나도 사실 그렇게 바쁠 때는 남자친구랑 연락 잘 안되기도 하고 그래.”
“주임님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승태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우리 팀에서 승태 씨 빼고 다 알고 있을걸?”
“엥? 왜 저만 몰랐죠?”
“내가 얘기를 안 했으니까.”
“왜 얘기 안 하셨어요?”
“안 물어봤으니까.”
승태는 순간 울컥해 주임만 아니었으면 한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아니야 원래 저런 사람이잖아. 얄미운 사람. 어휴.
“뭐 어쨌든 축하해 승태 씨. 그래서 그런지 얼굴도 좀 핀 것 같네.”
“네네. 점심 시간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가주시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메롱이다.”
얄미운 걸음걸이로 자리로 돌아가는 김 주임을 보며 터지려는 화를 겨우 억누른 승태는 스마트폰에 떠있는 메시지를 보았다.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아들, 이번 주말에 내려오지? 몇 시에 올거야?]
[이번 주말에는 안 내려 갈라고. 여자친구랑 같이 있을 거다.]
엄마에게 답장을 하자마자 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이제 막 일을 하려던 승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들 여자친구 생겼어?”
“응, 엄마. 아들 이제 연애해.”
“어머 아들 축하해. 나중에 부산에도 한번 내려와!”
“어떻게 부산까지 데려가. 어쨌든 이번엔 나 못 가요.”
“근데 승태야, 외할머니가…”
승태에게 외할머니는 그 어떤 친척보다 남달랐다. 어릴 때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 대신 승태를 키워주셨고 승태 역시 항상 다정하고 인자했던 할머니를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부모님이 승태를 데리러 와도 집에 안 가겠다고, 할머니랑 잘 거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늘 정정하셨지만 2년 전 시장에 다녀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신 뒤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셨다. 거듭된 수술은 할머니의 건강까지 도려낸 듯했다. 깨어나셨다가 수술했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병원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너무 고령인 탓에 그 많은 수술을 견뎌내기 어려우셨고 병원에서는 아마 오래 버티시긴 힘들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외삼촌은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인데 말이 되는 소리냐며 의사의 멱살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하셨다. 그때가 벌써 1년 전이었다. 아직 살아계시긴 하지만 엄마와 통화를 하면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시곤 하셨다. 그렇기에 승태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외할머니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 내려갈게.”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승태는 사무실로 돌아와 착잡한 마음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그러나 마우스만 잡고 있을 뿐 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운 기분을 억누르고 우선 다정에게 연락을 남겨두었다.
[다정아 미안. 나 내일 부산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무슨 일 있어?]
[외할머니가… 이제 진짜 힘드신 가봐.]
다정에게 빠르게 답장이 와 사정을 설명했다. 다정 역시 승태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답장을 이어나갔다.
[응… 아무 생각 말구 조심히 다녀와.]
[연말에 같이 있기로 했는데 미안…]
[그런 걸로 미안해 하는 거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다녀와.]
[고마워… 연락할게.]
승태는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창밖의 하늘은 벌써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