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태가 부산으로 내려간 이후로 다정은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거의 거울에 반사되듯 돌아오던 연락도 점점 드문드문 오게 되었다. 그만큼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얘기겠지. 승태가 얼마나 힘들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정도 부산으로 내려가 승태의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가족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닐까 싶어 굳이 그 말을 승태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번씩 연락이 오면 최선을 다해 위로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새해 첫날이 밝았다.
이번 새해 첫날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줄 알았다. 승태에게 맛있는 걸 해주려고 이것저것 레시피도 찾아봤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새해에 뭘 하면서 놀지 버킷리스트도 작성해보려고 했다. 설레는 여행, 추억이 될만한 액티비티 등 상상만 해도 즐거운 새해가 될 터였다. 분명 그랬었는데 누구보다 우울한 새해 첫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해를 맞아 기뻐하는 사람들이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더 우울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정의 우울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12시가 되자마자 승태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다. 혹시나 빨리 답장이 올까 싶어 스마트폰을 꼭 쥐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승태의 답장은 빠르게 오지 않았다. 바쁘고 정신 없겠지. 그렇게 기다리기를 30분, 다정은 이내 포기하고 스마트폰을 저 멀리 던져두고는 잠에 빠져 들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다정아. 답장 늦어서 미안해.]
일출을 라이브로나마 보려고 아침 6시쯤 일어난 다정은 새벽 3시쯤 승태에게 돌아온 답장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시간까지 잠도 못 잤구나. 그래도 잊지 않고 답장해줬네.
[고마워. 난 라이브로 일출 보려구 좀 일찍 일어났어.]
승태의 새해 인사에 답장을 하고 유튜브를 켜 일출 라이브를 검색했다. 울산 간절곶, 포항 호미곶, 강릉 정동진 등 전국 각지의 일출 명소들을 돌아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일출이 보일지 안보일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승태에게 답장이 왔다.
[일찍 일어났네. 일출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승태 너도 일찍 일어났네? 아까 답장 새벽에 보냈던데 피곤하겠다…]
답장을 보내자마자 승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놀란 마음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응, 승태야.”
“새벽에 계속 엄마랑 얘기하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잤어.”
“많이 피곤하겠네. 할머니는 좀 어떠셔?”
“어제 밤이 진짜 고비였어. 의사 말로는 어제 밤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오늘 아침까지 잘 버티셨네.”
순간 다정은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뻔 한 것을 겨우겨우 삼켰다. 이 상황에서 그 무엇 하나도 다행인 건 없었다. 할머니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승태의 피로 역시 계속 쌓여가고 있었으니까. 그때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다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정아 미안. 나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응, 괜찮으니까 다녀와.”
다시 전화한다는 승태의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다정도 함께 긴장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라이브로 새해 첫 일출이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괜히 저 반짝이는 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승태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회사에 연차를 내고 부산 본가에 며칠 더 머무르다가 그 다음주가 되어서야 서울에 돌아왔다. 장례 기간 동안 거의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간간히 전화와 메시지로 괜찮다고 말하던 승태였지만 척 보기에도 힘들어하는 게 느껴져서 다정의 마음도 심란해졌다. 다정은 승태에게 어떻게든 힘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힘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승태는 다정의 집으로 향했다. 당장 기댈 곳이 필요했다. 다정은 승태가 거의 도착했다는 연락에 괜히 긴장하면서 승태를 기다렸다. 벨이 울리고 잔뜩 수척해진 승태가 눈에 보였다.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승태가 다정의 어깨에 기대며 안겼다. 다정은 그런 승태를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다정의 어깨가 점점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다정은 승태에게 늦은 저녁을 차려주었다. 승태가 다정이 저녁을 차리는 것을 돕겠다고 했지만 괜찮다며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다. 승태는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밥을 제대로 못 먹었는지 다정이 해준 음식을 숨도 쉬지 않고 먹었다. 힘들어 보였는데 밥을 잘 먹는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다정이었다. 승태는 장례식 때 사람들이 많이 왔다는 둥 할머니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둥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얘기해줬다. 그치, 다행이라는 말은 당사자가 써야하는 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어 다정은 승태의 얘기를 들으며 최소한의 리액션만 해주었다.
“계속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보고 싶었다는 승태의 말에 다정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보고 싶어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 그런 상황에 옆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 다정 역시 계속 승태가 보고 싶었다는 그리움 등 여러 감정이 다정의 내면에 휘몰아쳤다. 그 모든 감정을 담아서 승태에게 웃어보이며 딱 한마디를 건넸다.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겨울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을 지나 입춘에 다가섰다. 날씨가 특별히 따뜻해지지는 않았지만 체감상 곧 차가운 계절이 지나갈 것임이 느껴졌다. 그동안 승태는 다시 회사에 적응하느라 힘든 날들을 보냈다. 공석인 동안 팀원들이 대신 처리했던 일들도 인계 받고, 어떻게든 원래의 업무 속도로 다시 텐션을 올리느라 부단히 애를 썼다. 팀원들이 건네는 괜찮냐, 힘들면 쉬엄쉬엄 해도 된다는 말들이 꽤 위로가 되긴 했지만 떨어진 텐션은 쉽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승태와 다정은 오랜만에 카페에 앉아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승태가 서울에 돌아온 이후 밖에 돌아다니길 꺼려해 거의 집에만 있었던 둘이었지만 다정의 제안으로 모처럼 밖에 나온 것이다. 승태도 내키진 않았지만 막상 나와보니 나쁘지 않은 듯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우리 여행 갈래?”
창밖을 보며 멍때리던 승태에게 다정이 말했다.
“갑자기 웬 여행?”
“그냥 기분 전환도 할 겸 가까운 데로 갔다 오자 어때?”
“음… 글쎄… 요즘 좀 바쁘기도 하고 힘들어서…”
“알아. 그래도 계속 이렇게 기운 없이 있을 수는 없잖아.”
다정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다정에게 이렇게 쳐져 있는 모습만 보일 수는 없었다. 이런 마음과 그래도 다정이라면 자신의 힘든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그냥 스스로 기운 차리게 놔둬줄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서운한 마음도 함께 들었다. 승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같이 여행 가자. 응?”
다정이 한 번 더 승태에게 물었다. 승태는 잠시 고민하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