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당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와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브는 어딘가 다음날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한 느낌이라면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면 그 기분들이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느낌이 있다. 이는 승태의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다정과 승태는 오랫동안 친구였지만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본 적이 없었다. 서로 각자의 연인이 있었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굳이 둘이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이유가 없었기 떄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크리스마스는 커플들을 위한 날이라는 인식이 승태에게 특히 강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다정과 함께 석촌호수에 산책을 가기로 정하고 난 직후부터 설레는 기분이 심장이 뛰는 속도에 맞춰 온몸에 퍼져나갔다. 슬랙스와 니트, 코트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도 유난히 신경써서 세팅하고 석촌호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커플들이 저마다의 연인과 손을 잡고 팔짱을 끼며 유유히 인파를 만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헤치고 산책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 찰나 어느새 나타난 다정이 승태의 어깨를 톡톡 쳤다.
“사람 진짜 많다!”
승태가 뒤를 돌아보자 리본이 달린 하늘색 블라우스에 검은 H라인 스커트를 입고 두툼한 코트를 걸친 다정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럽게 웨이브진 머리가 겨울 바람에 살랑거리며 향긋한 샴푸 냄새가 승태에게 흘러들어왔다. 승태는 그런 다정을 꼬옥 안아주고 인파에 섞여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당일 석촌호수의 야경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가 눈부시도록 반짝였고 특히 평소에도 화려하기 그지 없던 롯데월드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마치 하늘의 별을 다 따다가 달아놓은 듯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승태가 롯데월드에도 한번 가볼까 하고 다정을 넌지시 떠봤지만 가면 지금보다 사람이 더 많아서 꼼짝도 못할 것 같다며 절레절레했다. 다정에게는 지금도 사람이 충분히 많긴 하지만 크리스마스인걸 감안하면 이정도는 괜찮은 듯 싶었다.
“너랑 크리스마스에 이러고 있는게 좀 신기하긴 해.”
한참을 걷던 중 다정이 승태를 보며 말했다. 크리스마스 일정을 정했을 때부터 승태가 느꼈던 그 기분을 다정도 느꼈구나 하고 신기하면서도 이렇게 예쁜 날에 함께하고 있는 이 기분이 그저 좋았다.
“그래서 난 너무 좋아.”
승태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자 다정도 함께 환하게 미소지었다.
커다란 트리 앞에 도착하자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래도 나름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다정과 승태도 찍을 수 있었다. 앞에 먼저 찍었던 커플이 승태와 다정에게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해서 다정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넸다.
“아이, 두 분 좀 더 다정하게 붙어봐요!”
사진을 찍어주시는 남자 분이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포즈를 잡아줬다. 뭔가 나란히 서서 여느 커플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승태와 다정은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지만 그 남자 분 덕에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팔짱도 끼고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며 열심히 자세를 잡았다. 당신들의 사진보다 자신의 사진을 더 열심히 찍어주는 남자가 웃겨 다정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론 결과물은 대만족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구경하고 사람들에게 치이다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정은 급격히 기가 빨려 앉아서 쉬고 싶었만 벤치들은 이미 다른 커플들이 차지하고 있어 쉴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 상태를 승태가 빠르게 눈치 채고 넌지시 다정에게 물었다.
“슬슬 집에 갈까?”
“응… 기빨려…”
걷기 시작한지 한시간 남짓 지났는데도 어딘가 축 쳐져 있는 다정이 승태는 괜히 귀여웠지만 민망해 할까봐 굳이 놀리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활기가 가득하던 다정이 유난히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면 급격하게 힘들어 하는 게 그저 신기했다. 예전에 들은 바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명 한명 다 주의 깊게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일 뿐인데 뭐하러 그렇게까지 주의 깊게 보냐고 물었지만 다정은 일부러 보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했다.
전철을 타고 승태의 집에 도착하니 다정은 다시 평소처럼 기운을 차린 듯했다. 배달 어플을 열어 뭘 먹을지 고르는 모습이 아까보다 유난히 신나보였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양식이겠지?”
다정은 페페로니가 잔뜩 들어간 피자와 치즈오븐 스파게티를 시키고는 비스듬히 기대 앉아있는 승태의 다리를 베고 누워 아까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봤다. 자연스럽게 누워 있는 다정을 보고 거기에 자연스러움을 한 스푼 더해 승태가 다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거 되게 잘나왔다!”
“우와! 아까 그분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찍어주시더니 보람이 있었네~”
다정은 스마트폰을 들어 아까 트리 앞에서 손을 마주 잡고 찍었던 사진을 승태에게 보여줬다. 승태도 만족스러운듯 얼른 사진을 받아 배경화면과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와 이렇게 바로 바꾼다고? 귀엽네 우리 승태~”
왠지 모르게 놀리는 다정의 말투에 기분이 묘했다가도 자신을 귀여워 하는 다정을 보니 괜히 뿌듯하면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근데 막상 크리스마스라고는 해도 별건 없다.”
“어릴 때 보냈던 크리스마스랑은 뭔가 느낌이 다른 것 같긴 해.”
“그러게. 그땐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놀았나 몰라.”
“그래서 지금 사람 많은 데 가면 그렇게 기가 빨리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아주 그냥 기가 쪽쪽 빨리지.”
승태가 다정의 볼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기자 다정이 승태의 허벅지를 동시에 꼬집었다. 그렇게 둘이 장난을 치고 노는 사이 어느새 피자가 도착했고 승태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와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아, 다정아. 부엌에 가면 와인 있는데 그거 좀 갖다줘.”
“와인이 있어?”
“그래도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엊그제 사왔어.”
“오, 박승태 센스!”
“그럼그럼 내가 누군데~”
다정이 와인을 가져와 코르크를 따고 영화를 켜는 사이 승태가 피자와 스파게티, 와인잔을 세팅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호흡이었다. 짧은 산책에 배달로 주문한 피자, 마트에서 사온 와인이었지만 크리스마스 느낌은 물씬 풍겼다. 서로가 함께 보내는 첫번째 크리스마스였기에 소소하지만 더욱 의미가 있었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오랜 친구이자 연인과 함께 보내는 일상적이면서도 소중한 하루였다.
와인의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매번 쓴 소주나 맥주만 먹다 보니 이런 와인을 먹을 기회가 잘 없었는데 승태가 와인을 잘 골라왔다고 생각했던 다정이었다. 짭조름한 피자와도 궁합이 꽤 괜찮았다. 그러다보니 다정은 자신도 모르게 와인을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도수가 쎈데? 몇 도야?”
“이거? 몇 도지… 뭐야 19도?”
“뭐? 어디 봐봐.”
다정이 승태가 들고 있던 와인병을 뺏어 들더니 도수를 확인하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달달하길래 도수가 그렇게 높지 않을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높은 도수에 갑자기 취기가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취하는 느낌이네…”
“그렇게 와인을 물처럼 마시니까 그렇지.”
“진짜 이렇게 도수 높을줄 몰랐지.”
“근데 나도 몰랐네. 그냥 당도만 보고 사왔더니…”
“너, 이거, 아주, 그냥… 이렇게 도수 높은거 사와서 먹여놓고 뭐하려구!”
갑자기 취한 다정이의 목소리와 멘트에 당황한 승태가 어버버 하고 있자 다정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승태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훅 치고 들어오는 다정의 행동에 당황함을 더욱 느끼는 승태였지만 갑작스러운 취기와 함께 왠지 모를 자신감이 올라오는 듯했다.
“왜? 내가 뭐 할 것 같아?”
당황함을 감추고 더 바짝 붙어 앉은 승태의 행동에 이번엔 다정이 적잖이 당황했다. 어? 이게 아닌데? 하는 그 찰나의 순간 승태의 입술이 다정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승태의 입술이 다정의 입술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멀어지고 승태는 다정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정의 마음 속에서 취기를 넘어선 설렘이 피어나려던 찰나 다시 승태의 입술이 다가왔고 승태의 혀가 경계선을 넘어 다정의 혀에 와 닿았다. 자연스럽게 둘의 혀가 섞이는 동안 승태는 다정에게 더욱 밀착했고 어느새 다정의 허리에는 승태의 팔이, 승태의 어깨에는 다정의 팔이 감겨있었다.
“하…”
취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8년 동안 친구였던 서로와의 첫 키스였기 때문이었을까. 이 순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온몸의 모든 신경이 쏠렸다. 행복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키스를 나누던 사이 승태의 팔이 다정의 허리에서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 블라우스의 리본을 풀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자, 잠깐…”
이미 아까 틀어두었던 영화 소리는 더이상 다정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