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네 딱 그럴 줄 알았어. 어휴 뭐하느라 8년이나 질질 끌었대.”
“질질 끈 게 아니고 임마. 이제 와서야 마음이 맞은 거지.”
모처럼 승태 집에 놀러온 혁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승태를 노려보았다. 승태와 혁준이 처음 만난 것은 군대에서였지만 같은 학교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되고 나서 급격하게 친해졌다. 그래서 둘은 서로 과는 달랐지만 자주 왕래하며 교양수업을 같이 듣거나 서로의 과 친구들을 소개해 주기도 하며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직장이 다르다 보니 예전 만큼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때를 추억하며 연락을 이어오고 있었다. 적어도 혁준은 그랬었다. 그랬는데 몇 달 안 본 사이에 승태와 다정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혁준은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임마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줬어야지. 꿀잼을 놓쳤잖아.”
“그동안 진짜 바빴어. 그래도 우리 애들 중에는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거야.”
“하 드디어 너희가 연애를 하는구나. 그때 애들끼리 말은 안 했어도 너희가 연애 한다, 안 한다로 내기 했었으면 아마 애들 다 100% 한다에 걸었을걸?”
“그게 무슨 내기냐? 한쪽에 다 걸면 내기가 성립이 안되잖아.”
“그만큼 애들은 다 확신했다고 임마.”
“그런가? 어휴, 야 밥이나 먹어.”
승태는 잔뜩 흥분한 혁준이 징그럽다는 듯 어떻게든 대화를 끊으려 밥을 한 숟갈 떴다. 승태와 혁준, 다정을 포함해 대학시절 함께 자주 만나던 친구들은 6명이었다. 1학년 때부터 친했던 승태와 다정, 같은 과 친구였던 범석, 승태과 군대에서 만난 혁준, 혁준의 같은 과 친구 서연, 그리고 당시 혁준의 여자친구였던 수희가 있었다. 그러나 혁준과 서연의 사이가 승태와 다정이만큼 친한 사이였다 보니 그걸 보고 질투를 느낀 수희는 참다 못해 혁준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떠나버렸고,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서연에게 호감을 느끼던 범석이 서연에게 고백을 했다 차인 후 범석과의 연락도 점점 뜸해지더니 결국 연락이 두절됐다. 결국 승태와 혁준에게는 20대 초반에 자신과 가장 친했던 이성 친구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는데 다정과 승태가 사귀기 시작했으니 혁준이 어이없어 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근데 우리가 8년이면 너랑 서연이도 8년인데 너네는 한번도 설렌 적 없어?”
“우리? 야, 징그러운 소리 좀 그만해. 우리가 너네랑 같냐?”
“다를 게 뭐야. 하긴 너랑 서연이가 사귄다고 생각하면 서연이가 좀 많이 아깝긴 해.”
“뭐? 어휴 진짜 너 내가 다정이 봐서 살려주는 거다. 사귄지 얼마 안돼서 초상 치를까봐.”
“지랄났네. 죽여봐. 오늘 향 냄새가 달달하겠네 아주.”
혁준이 승태를 향해 숟가락을 내려치려는 찰나 도어락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다정이 들어왔다. 바깥 날씨가 많이 추웠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도 승태를 보자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다정아! 혁준이가 나 죽일라고 해!”
“미안하다 다정아. 네 남친 오늘 주님 곁으로 보내야겠다.”
“아휴 그만 좀 해! 진짜 애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그러고 놀래?!”
다정의 일침에 혁준은 씩씩거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승태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킥킥대고 있었다. 다정이 승태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고 승태는 다정을 바라보고 손을 감싸며 자신의 온기를 다정에게 전해줬다. 가뜩이나 성이 난 혁준은 그 꼴을 못 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정과 승태 둘 중 그 누구도 혁준을 신경쓰지 않았다.
“다정아 네가 봐도 나랑 김서연이 사귀면 걔가 더 아까워?”
“이건 또 뭔 소리야? 너네도 사겨?”
“아니 미쳤냐. 승태가 그딴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승태가 다정이 오기 직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다정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너무 웃겨 그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에이 혁준이 정도면 괜찮지 왜! 안 아까워, 안 아까워.”
“다정아 너 지금 표정이랑 말투에 진심이 하나도 없어.”
다정의 반응을 본 혁준은 ‘됐다, 됐어’ 하는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대고는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에휴 난 갈란다. 너네 커플끼리 놀아라.”
“야, 오랜만에 와놓고 어디가. 한잔하고 가야지. 혹시 삐졌냐?”
“아니야 임마. 내일 출근하려면 오늘 일찍 자야 해. 술은 조만간 먹자.”
혁준이 겉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다정과 승태도 일어서서 혁준을 배웅해주기 위해 그 뒤를 따라갔다. 신발을 신은 혁준은 다정과 승태를 번갈아가며 여러 번 보더니 피식하고 웃고는 ‘간다’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근데 집 되게 따뜻하네?”
“너 온다고 해서 보일러 틀어놨었지. 친구랑 저녁은 잘 먹었어?”
“응. 리조또 먹고 왔는데 거기 생각보다 꽤 맛있더라! 우리도 다음에 가보자.”
“좋아!”
다정은 승태에게 천천히 안겼고 승태도 다정을 따뜻하게 안아줬다. 아까 잠시 손을 잡고 있었던 때와 달리 승태의 온기가 다정에게 더욱 빠르게 전해졌다. 승태는 다정을 위해 따뜻한 커피와 쿠키를 준비해줬고 그 사이 다정은 승태의 TV로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서로의 어깨에 기대 앉아 커피와 쿠키를 나눠 먹으니 그 어떤 것보다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친구로서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서로 나란히 붙어 앉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온기와 평온함이었다.
“근데 아까 그거 진심이었어?”
“응? 뭐가?”
뜬금 없는 타이밍에 갑자기 승태가 주어 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있는 승태를 다정은 힐끗 쳐다봤다.
“혁준이 괜찮다고 했던 거.”
“엥? 뭐야! 너 설마 질투해?”
“아니 뭐,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데. 그냥 갑자기 생각 나서.”
“푸핫! 우리 승태 귀엽네! 당연히 장난이지 장난. 으이구.”
다정이 승태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연신 웃어댔다. 승태는 몸을 일으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다정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다정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승태 말대로 사실 그 말을 신경썼던 것도 아니었고 그냥 다정의 관심을 끌기 위한 말이었지만 다정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나도 이제 슬슬 가야겠다. 내일 출근해야지.”
“데려다 줄까?”
“아니야. 요 앞에서 택시 타면 금방이야.”
“그럼 택시 타는 것만 보고.”
승태는 겉옷을 대충 걸쳐입고 나와 다정의 택시를 기다려주고, 택시가 출발하기 전 번호판을 찍어 다정에게 보내주었다. 그러자 다정에게 곧바로 전화가 왔고 다정이 집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계속 대화를 나눴다. 장난과 애정이 뒤섞인 짧은 통화를 뒤로 하고 승태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밤하늘의 달은 그런 승태의 모습을 창 너머로 보고 있었다. 그 달빛은 똑같이 다정의 창문 너머로도 내려 앉았다. 그렇게 달은 승태와 다정 둘에게 편안한 주말의 밤을 선물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