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내리는 비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와 내리다가도 또 일찍 떠나버리곤 한다. 봄비만큼 변덕스러운 날씨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갔다. 따뜻해지는 한편 찬 공기는 여전히 남아 딱 감기에 걸리기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날씨가 변덕스럽다 한들 다정과 승태가 서로를 대하는 마음 만큼은 한결 같았다.
봄날의 구름도 변덕스러운 구석이 있다. 비를 보슬보슬 뿌려대는 옅은 구름들이 하늘을 온통 뒤덮는가 하면 한 번 흐리게 했으니 이번엔 예쁜 하늘을 보여주겠다는 듯 뭉게구름을 피워낼 때도 있었다. 승태는 그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 보냈고 다정은 덕분에 예쁜 하늘을 마음껏 구경했다. 어쨌거나 봄은 모두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아홉 번째로 함께하는, 아니 첫 번째로 함께 맞이하는 봄이 찾아왔다.
춘분을 지나면서 밤보다 낮이 길어지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퇴근 길에 항상 깜깜했던 저녁 하늘이 내심 아쉬웠던 다정의 입장에서는 춘분이 특히나 반가웠다. 물론 춘분이라는 것도 승태가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 승태가 사진과 함께 보내온 ‘이제는 퇴근할 때 노을을 볼 수 있겠다’는 말은 살랑거리는 봄 날씨에 더해 다정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봄의 온기가 겨울의 한기를 한창 밀어내고 있을 때쯤, 다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 뒤면 승태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친구로 지내면서는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정도 승태도 자신의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가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정은 승태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은근슬쩍 떠보았다. 꼭 필요하진 않아도 갖고 싶은 것은 없는지 매일 승태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막상 승태는 갖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없는 듯 보였다. 생각해보면 제작년인가 3년 전인가, 승태가 자신의 생일도 까먹고 지나갔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다정은 결국 혁준과 서연에게 SOS를 보내고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날 수 있었다.
“승태한텐 얘기 안했지?”
“어, 그럼. 우리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
“근데 너희 원래 생일 같은 거 잘 안 챙겼잖아.”
카페에 둘러 앉은 혁준과 서연은 다정이 뇌물로 사준 커피를 홀짝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정은 그런 둘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여자친구가 돼서 생일에 아무 것도 안 해주는 건 좀 그렇잖아. 승태가 내심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구…”
“승태 그런 걸로 안 서운해 할걸? 예전에 전 여자친구 만났을 때…”
“야 이 미친 놈아. 쓸데없는 얘기하지말고.”
서연이 혁준의 말을 가로막으며 팔을 세게 내리쳤다. 혁준은 이미 일상인 듯 아픈 내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
“그러고 보니 그 팔찌 승태가 줬나보네?”
“어? 너 어떻게 알아?”
“승태가 얼마 전에 나한테 그거 어떻냐고 물어봤거든. 딱 봐도 너 주려는 것 같더라.”
승태가 혁준에게까지 물어가며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며 다정의 선물을 골랐을 승태가 귀엽고 고마웠다. 그 얘기를 들으니 더더욱 승태의 선물을 제대로 준비해주고 싶었다.
“근데 승태 안 그래 보여도 은근 인형 같은거 되게 좋아하지 않아?”
“그렇긴 해. 대학 다닐 때부터 집에 뭐 진열해 놓고 이런 거 좋아하긴 했지.”
“예전에 혁준이 네가 승태 인형 만지작 거리다가 모가지 부러뜨려서 손절 당할 뻔 하지 않았어?”
“그떄만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없긴 해.”
다정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서연과 혁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러고 보면 승태의 집에는 항상 피규어나 인형 같은 것들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승태의 자취방에 갔다가 이런 취미가 있었냐고 놀려 먹었던 기억만 있었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그 피규어들이 아직도 전시되어 있었던 것 같다.
다정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았다. 간단한 선물을 그때 그때 필요할 때 하는 것은 잘 하지만 제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선물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뭘 해줘야 할지, 받으면 좋아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특히나 이번 경우는 더 그랬다. 여자친구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해주는 선물이다 보니 더 고민이 깊었다. 그게 9년차 친구이자 1년차 여자친구여도 다정이 혁준과 서연에게 SOS를 보낸 이유이기도 하다.
“근데 달랑 인형만 주기는 너무 소박하지 않나…”
“뭐 어때 생일인데. 정 그러면 편지라도 써서 줘.”
“편지?”
확실히 편지에는 마음을 담는 효과가 있다. 별 내용 없이도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 편지를 쓰자. 매일 연락을 하고 자주 만나기도 해서 작정하고 무슨 말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쓰다보면 써지겠지.
“그래, 편지 괜찮네. 고마워 얘들아. 도움이 많이 됐어!”
“너도 나한테 편지 좀 쓰고 해라 혁준아.”
“내가 너한테 편지를 왜 쓰냐. 어디 아파?”
“나가 뒤져 그냥.”
다정은 티격태격하는 혁준과 서연을 보며 한바탕 웃다가도 금세 고민에 빠졌다. 편지도 편지인데 어떤 인형을 선물해야 할까. 키링 같은 간단한 것도 괜찮겠지. 이번 주말에는 선물 사러 돌아다녀 봐야겠다. 이런 생각들이 다정의 머릿속을 빠르게 휘젓고 지나갔다. 생일 준비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승태의 생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주말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인터넷도 뒤져 꽤 동그랗고 귀여운 캐릭터 키링을 발견했다. 헤드셋과 선글라스를 낀 고양이 캐릭터의 키링이었는데 그걸 발견했을 때 이거다 싶었을 정도로 귀여웠다. 거기다 의외의 수확이 하나 더 있었는데 승태가 커피머신을 갖고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평소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카페를 가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승태였지만 어찌됐든 마음 먹고 커피를 마시려면 카페를 갈 수밖에 없는 게 귀찮다며 커피 머신이 하나 있으면 딱 좋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렇게 키링과 편지를 준비해 챙기고 커피 머신을 승태네 집으로 주문했다.
생일은 소소하게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혁준과 서연에게도 승태네 집에서 생일파티를 할 예정이니 놀러오라고 했다. 서연은 생각해보니 승태네 집에 놀러가 본 적이 없다며 기대했다. 승태도 밖에서 괜히 북적북적하게 파티를 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소소하게 노는 게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 생일이라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게 쑥쓰러운 듯 했다.
신기했던 것은 올해 승태의 생일이 춘분과 같은 날이라는 것이다. 하필 목요일이기도 하고 생일은 또 지나고 나서 챙기는 게 아니라는 엄마 말이 떠올라 그 전주 주말에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선물 준비도, 편지도, 파티 때 같이 구워 먹을 소고기도 그날에 맞춰 준비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