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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Nov 09.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0

승태와 다정은 서연과 혁준이 한바탕 휩쓸고간 술상을 전체적으로 한 번 더 싹 치웠다. 어느 정도는 그 둘이 치워 놓고 가긴 했지만 여전히 설거지 거리나 정리되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가 남아 있었다. 2차를 시작하더라도 한번은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치워야 속이 후련한 승태의 성격상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다정도 승태의 그런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따랐다.


“대학교 때 MT 갔을 때 생각 나네. 그때도 너랑 나랑 둘이 이렇게 치웠었잖아.”


다정이 마지막 쓰레기를 봉투에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승태도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꽉 묶으며 답했다.


“그러게.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한번 놀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내말이. 걔네는 여전히 시끄럽고.”

“그래도 보고 있으면 웃기긴 하잖아.”

“그렇긴 해.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다정의 말을 듣고 승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승태와 다정도 지금의 서연과 혁준처럼 티격태격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 장난을 치긴 하지만 친구에서 연인이 된 이후로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욱 서로에게 다정해졌다. 그와 동시에 친구에서 연인이 된 우리 같은 사이의 가장 큰 장점이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오래 봐왔던 사이였기에 더 장난도 칠 수 있고 서로를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만큼 배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기서 끙끙거리며 쓰레기 봉투를 꾹꾹 누르고 있는 다정이 더 귀엽게 느껴졌다.


“다 했어? 내가 버리고 올게. 손 씻고 와.”

“응, 땡큐!”


승태는 다정에게 쓰레기 봉투를 받아 음식물 쓰레기를 함께 챙겨 집앞에 내다버렸다. 한기와 온기를 동시에 담은 바람이 승태를 스쳐 지나갔다. 승태는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씨 좋네.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니 다정이 마른 안주와 맥주를 준비해 두고 쇼파에 널부러져 있었다. 승태는 그런 다정에게 다가가 뒤에서 업히듯 끌어 안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좋아서.”

“아이 무거워. 내려와.”


다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돌아 앉아 승태를 꼬옥 안아주었다. 승태의 온기가 다정에게, 다정의 온기가 승태에게 서로 옮겨갔다.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추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에게 따뜻한 애정을 전했다.

자세를 고쳐 다정의 옆에 앉은 승태가 맥주 캔을 따고 환하게 웃으며 다정에게 캔을 건넸다. 다정이 캔을 받아 들자 승태는 다정의 앞에 놓인 맥주 캔을 가져와 따고는 다정의 캔에 살짝 부딪혔다. 맥주의 시원하고 씁쓸한 맛이 탄산과 함께 목을 타고 거칠게 넘어 왔다. 크 소리가 절로 나는 맛이었다.


“난 맥주랑 언제쯤 더 친해질 수 있을까?”


다정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손등으로 입술을 슥 닦았다. 승태가 오징어 하나를 다정에게 먹여주며 말했다.


“너 맥주 잘 먹지 않았어?”

“못 먹진 않는데 그냥 있으니까 먹는 느낌? 난 역시 소주가 입에 맞아.”

“그건 나도 그래.”

“그럼 다음엔 냉장고에 소주 좀 채워 놔봐.”

“너 나보다 술도 못 먹잖아.”

“뭐? 나랑 싸우자고?”

“농담이야 농담.”


승태가 하하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확실히 생일 파티 덕분인지 승태는 기분이 한껏 좋아 보였다. 행복해 하는 승태를 보니 다정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마신 낮술 덕분도 있겠지만 아마 뭘 했어도 오늘은 마냥 행복한 날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서늘한 밤의 봄바람이 승태네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그 찬바람이 승태와 다정의 취기를 살짝 상기시켜 놓는 듯했다. 유튜브를 켜놓고 있지만 영상의 내용 따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승태의 어깨에 살짝 기대 있는 지금이 그냥 너무 좋을 뿐이었다.


“생일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


승태가 어깨에 기대 있는 다정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다정은 그런 승태의 손을 꼭 잡으며 답했다.


“당연한 걸 뭐.”


승태는 다정의 손을 잡아 끌어 그대로 자신의 품 안에 넣고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약간 불편한 자세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지금 이 기분이 너무 좋아서일까. 팔이 둘러진 다정은 승태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다정이도 지금 나만큼 기분이 좋을까. 승태는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에게 기대 있었다. 그러다 승태가 고개를 돌려 다정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다정은 얼굴에 물음표와 미소를 동시에 띄우고는 그런 승태의 눈을 마주쳤다. 승태도 그런 다정에게 미소지으며 천천히 다가가 다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포개었다. 다정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승태는 자신의 입술로 다정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는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다정도 그에 맞춰 승태의 윗입술을 물었다. 그러다 서로의 혀끝이 닿고 다정은 승태의 목을 감으며 껴안았다.


“하…”


달콤한 키스의 뒤에는 달달한 행복이 남았다. 술을 마신 뒤라 얼굴이 더 빨개진 다정의 표정은 새삼 귀여웠다. 승태는 그런 다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일어나 언제 쓰러졌는지 모를 맥주캔을 집어들고 분리수거 통에 넣었다. 다정은 멍하니 앉아 그런 승태를 따라 시선만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슬슬 벚꽃 필 때 되지 않았나?”


분리수거를 마친 승태가 다시 돌아와 다정의 옆에 앉았다.


“맞아! 아마 4월 쯤 되면 피기 시작할걸?”

“어째 벚꽃 피는 시기도 매년 조금씩 늦어지는 것 같아.”

“이러다 지구 멸망하겠어.“

“벚꽃 늦게 펴서…?”

“그럼그럼. 그러다가 한순간에 멸망하는 거야 승태야.”

“그럼 진짜 억울하긴 하겠다.”


승태는 받아치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다정은 승태의 그 표정을 보고 깔깔 웃었다.


“벚꽃 피면 한강에 벚꽃 보러 갈까?”

“좋지 좋지! 혹시 그때도 우리 라면 먹어?”

“에이 그땐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생각해둔 게 있지!”

“뭔데?”

“음… 비밀이야. 그때 가서 말해줄게!”

“아 궁금하잖아!”


다정이 볼을 부풀리며 심통난 표정을 지었지만 승태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런 승태가 얄미워 팔뚝을 찰싹 때렸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됐다. 이번 한강에서는 달달한 일이 잔뜩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밤은 점점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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