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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Nov 10.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1

“어휴 숨막혀…”


다정 보다 먼저 도착한 승태는 한강에 사람이 잔뜩 모여 있는 걸 보고는 숨이 턱 막혔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이야. 벚꽃 필 때 한강에 오면 벚꽃 반, 사람 반이라더니 그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승태는 지금껏 벚꽃 시즌에 한강을 와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는 물론 여자친구가 있을 때도 사람 많은 곳은 가능하면 피해 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그 정도로 사람이 많으면 보고 싶은 만큼 마음껏 볼 수 없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괜히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정이 돗자리 같은 건 챙겨갈 생각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이럴 걸 예상했기 때문이란 걸 승태는 금방 알아차렸다. 대충 둘러 봐도 돗자리를 펼 자리 따위는 커녕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흩날리고 있는 벚꽃 만큼은 눈부시게 예뻤다. 잠시 그렇게 벚꽃에 한눈 팔려 있는 사이 다정이 슬그머니 다가와 승태를 놀래켰다.


“야!”

“깜짝이야! 왔어?”

“뭘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어. 누가 잡아가도 모르겠네.”

“한강에 벚꽃 보러 온 게 처음이라 구경 좀 하고 있었지.”

“처음이라고? 어휴 촌놈.”

“뭐라 했냐.”

“헤헤, 좀 걸을까?”


다정은 하얀 원피스에 청남방을 걸쳐 입고 있었다. 저번에 한강 같이 왔을 때도 원피스를 입었던 것 같은데 오늘 따라 유난히 예쁘다고 승태는 생각했다. 다정은 멍하니 다정을 보고 있는 승태의 손을 잡고 그나마 사람이 없는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인파를 해치고 요리조리 지나가는 다정의 모습은 이렇게 사람 많은 한강이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러다 벚나무 아래 비어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는 잽싸게 달려가 앉으며 승태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와, 이 시간에 벤치 비어 있는 거 처음 봐.”

“한강 많이 와 봤나 봐? 사람들 피해 다니는 게 능숙하던데?”

“그렇다고 치고 갈 수는 없잖아. 어머, 우리 승태 질투하는 거야?”

“아, 정말. 뭐래.”

“귀엽네, 귀여워.”


그런 느낌으로 물어본 거 아니라고 받아치려다 승태는 그냥 눈을 흘기는 걸로 그 대화를 끝맺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이 살랑 불어 벚꽃잎이 흩날리다 다정의 머리 위에 몇 가닥 내려 앉았다. 승태는 그 중 한 가닥을 떼어 다정에게 보여줬다. 다정은 벚꽃잎이 귀엽다며 해맑게 웃었다.

다정과 승태가 앉아 있는 사람들 앞으로 수많은 커플들이 지나갔다. 다정은 이 많은 커플 중에 우리보다 더 특별한 커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덟 번의 계절 동안 친구로 지내다가 연인으로서 첫 번째로 봄을 맞이한 커플. 적어도 다정의 생에, 그리고 승태의 생에도 이렇게 특별한 커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문득 승태를 봤는데 유난히 승태의 멍하니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옆에 있기에 편함이 물씬 느껴졌다.

한번 더 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리더니 승태의 입술에 착 달라붙었다. 승태는 깜짝 놀라 푸푸거리며 벚꽃잎을 떼어냈다. 그 모습을 본 다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한번 먹어보지. 혹시 맛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리와. 너 한번 먹여줄게.”

“에이, 아냐아냐. 우리 승태한테 누나가 양보해야지.”

“어휴 정말. 이런 건 양보 안 해줘도 된다구.”


다정이 계속 키득거리며 승태를 놀려댔지만 승태는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다정의 웃음이 멈출 때쯤 승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요즘 일 하는 건 어때?”

“늘 하기 싫지 뭐. 그래도 좀 바쁜 시기는 지나가서 이제는 꽤 괜찮아졌어.”

“다행이네.”

“승태 넌 요즘 좀 어때?”

“말도 마. 내가 예전에 얘기했던 그 김 주임님 기억 나? 그 사람이 자꾸 여자친구 어떤 사람인지, 성격은 어떤지, 잘해주는지, 물어봐서 일을 못할 지경이야.”

“그 사람이 그런 걸 왜 물어? 남자 분이야?”

“아니 여자아. 그냥 나도 너무 좋다.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 얘기해도 자꾸 물어봐. 귀찮아 죽겠어.”


다정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친구의 친구가 자신을 궁금해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직장 동료가 저렇게까지 궁금해 하는 건 본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보니 다정의 회사에 있는 한 대리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그때 남자친구 얘기를 하고 도망친 이후로 한두 번 정도 남자친구는 어떤지 물어보긴 했었다.


“우리 회사 한 대리님도 몇번 물어보긴 했었는데 그렇게까지 귀찮게 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그래? 한 대리님이 누군데?”

“나 입사 했을 때 가르쳐주던 사수 분이셔. 내가 남자친구 있다고 자랑하고 도망갔더니 몇번 물어보긴 하더라구.”

“도망갔다는 게 너무 웃기네. 굳이 도망을 쳐야 했어?”

“너네 김 주임처럼 귀찮게 할까봐 그랬지.”

“하긴 진짜 귀찮긴 해.”

“내 말이. 계속 앉아 있으니까 찌뿌둥하다. 좀 걸을까?”


다정이 옷을 탁탁 털며 일어나 승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태는 다정의 손을 잡고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 많은 쪽을 등지고 걸으니 확실히 가면 갈수록 점점 사람보다는 벚꽃이 더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벚꽃 나무 아래에 마침 사람이 비어 있을 때를 틈타 같이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너 혼자 서봐. 내가 찍어 줄게.”


승태가 다정을 세워두고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있던 그때 누군가 다가와 승태에게 말을 걸었다.


“승태 씨, 이런 데서 다 보네?”


돌아본 곳에는 김 주임이 레더 자켓에 와이드 청바지를 입고 서 있었다. 승태는 하마터면 놀라서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김 주임님이 여기 왜 있어요?”

“왜 난 여기 있으면 안돼?”

“아니 뭐 그건 아닌데…”

“승태야 누구야?”


나무 아래에 서있던 다정이 당황한 표정을 하며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세요 김나리라고 합니다. 승태 씨 회사에서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네, 저두요. 승태 씨 여자친구 분이 계속 궁금했는데 엄청 예쁘시네요.”


김 주임이 방긋 웃으며 다정에게 칭찬을 건넸지만 다정은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승태도 다정이 불편해 하는 걸 알았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주임님도 친구 분이랑 놀러 오신 거예요?”

“아니 나는 혼자 왔어. 그냥 사람 구경하면서 돌아 다니니까 생각 정리도 되고 좋더라구. 승태 씨를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 그러시구나.”

“어 뭐야! 다정 씨 아냐?”


그때 승태의 뒤쪽에서 명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다정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승태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한 대리님! 뭐예요?”

“뭐긴 뭐야. 쉬는 날 한강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해? 아, 안녕하세요. 이쪽은 남자친구 분?”

“안녕하세요, 박승태라고 합니다. 다정이 남자친구에요.”

“이야 그렇구나! 저는 다정 씨랑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는 한상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쪽 분은…”

“아 저희 회사 김나리 주임님이세요.”

“아 그러시구나! 반가워요 반가워요!”

“네 저도 반가워요.”


한 대리가 크게 웃으며 인사하자 김 주임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받아쳤다. 다정과 승태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겨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건 여지 없이 한 대리였다.


“이렇게 사람 많은데 어떻게 딱 여기서 만나냐. 너무 신기하다! 뭐하는 중이었어?”

“저랑 승태랑 벚꽃 구경하고 있었는데 여기 김 주임님이 승태 알아보셔서 인사 나누던 중이었어요.”

“어머 다정 씨,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회사 사람도 아닌데. 제가 두 살 많거든요.“

“잠깐만 잠깐만. 다정 씨가 승태 씨랑 동갑이라고 했지? 그럼 저랑 동갑이시네요?”

“우와 그래요? 신기하네.”


붙임성 좋은 한 대리 덕에 이상하고 신기한 이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다정과 승태는 여전히 너무 어리둥절했지만 어느 정도 이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다같이 저녁 먹는 건 어때요?”

“어? 그럴까요? 다정 씨는 어때? 아, 남자친구랑 있는데 방해되려나?”

“어떡할까 승태야?”

“나는 뭐 괜찮아. 한 대리님 성격이 되게 좋으시네.”

“뭐 그렇긴 하지…”


내심 그냥 우리끼리 먹자고 하고 싶었던 다정이었지만 어차피 회사에서도 계속 봐야 할 사람들이라 그냥 승태와 둘이서만 먹기에는 나중에 더 어색한 상황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다정과 승태, 나리와 상철은 상철의 주도하에 근처 맛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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