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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Nov 17.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3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농사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올 한 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곡우라는 절기에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정은 요즘 깊은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 출근을 하긴 하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데 가있었다. 입사한 지 1년 반이 넘은 상황에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야 할지, 퇴사를 해야 할지 고민이 생긴 것이다.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해 많은 것들을 배웠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더 이상 이 회사에 오래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 다정은 더 배우고,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승태 너는 그런 마음 없어?”

“이직? 글쎄…”


카페에 앉아 승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커리어에 대한 얘기로 주제가 옮겨갔다. 다정이 열심히 채용 공고를 보고 있는 데도 승태는 그저 앞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SNS만 들여다 볼 뿐이었다. 중간중간 이거 보라며 너무 재밌다며 스마트폰을 들이미는 승태였지만 다정은 지금 저런 단순 재미거리에 한눈을 팔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은근히 귀찮은 티를 냈지만 승태는 오히려 강아지처럼 쪼르르 와서는 다정의 옆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근데 지금 회사도 잘 다니고 있잖아. 굳이 이직을 해야 해?”

“그렇긴 한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좀 더 경험을 많이 쌓아봐야지.”

“이직한다고 상황이 꼭 나아질까?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잖아.”

“그럼 가만 있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진대?”

“그런 건 아니지만…”


승태는 이 부분이 다정과 자신의 가장 다른 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대학 시절부터 다정은 뭐든지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학과 행사에도 대부분 다 참여했고, 심지어 3학년 때는 학생회 임원까지 했었다. 그러는 한편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직장도 서울에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승태는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 가능하다면 어찌 되든 상관 없다고 승태는 항상 생각해왔다.


“너도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있긴 있지. 난 지금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 되길 바라.”

“영원히? 으… 벌써 지겨워.”

“뭐야, 나랑 있는 게 지겨워?”

“아니 그런 게 아니잖아 바보야.”


다정은 노트북을 덮고 승태를 바라봤다. 다행히 그냥 장난이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정은 그런 승태의 팔에 팔짱을 부드럽게 꼈다.


“하… 모르겠어. 그냥 요즘 내 자신이 너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충분히 노력했고 그만큼 이뤘잖아. 너 열심히 사는 거 내가 알고 세상이 알아.”

“너는 아는데 나는 아직 모르겠나보다.”


한숨을 푹 내쉬는 다정의 머리를 승태는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서울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건가. 그냥 여유롭게 살면 안 되는 걸까.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현재를 즐길 수는 없는 걸까.


“좀 걸을까?”

“밖에 황사 심하대. 그냥 이러고 있자.”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하면 나아질까 싶어 제안을 했던 승태지만 돌아오는 다정의 대답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오늘은 건드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승태는 그 이후로 입을 닫고 있었고 다정 역시 가만히 승태에게 기대 생각에 잠겨있다가 스마트폰을 보다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며 말없이 앞날에 대해 고민했다. 다정은 도저히 오늘은 답이 나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승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

“너 바빠 보이길래. 방해 될까봐 그랬지.”

“아까 나가자고 했는데 안 나가서 삐졌어?”

“에이 그런 거 아냐.”

“이제 슬슬 나갈까?”

“밖에 황사 괜찮대?”

“아잇, 얼른 일어나.”


다정은 승태의 팔을 장난스럽게 때린 후 노트북을 챙겨 일어났다. 밖으로 나왔을 때 흐릿한 감은 있었지만 다행히 바람이 심하게 불지는 않았다. 승태와 함께 길을 걷는 와중에도 다정은 아직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답이 내려지기까지 이 생각의 연쇄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한편 같은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승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서울에서는 어딜 가야 유채꽃을 볼 수 있을까. 부산에서는 되게 자주 봤던 것 같은데 서울은 한강을 가지 않으면 유채꽃도 보기 힘들구나. 그래도 벚꽃 봤을 땐 참 좋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승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다정과 승태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 맞다, 승태야.”

“응?”

“저번에 우리 벚꽃 보러 갔을 때 나 데리고 가려던 맛집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거기… 그때 말 못했는데 너네 한 대리님이 데리고 갔었던 거기 가려고 했었어.”

“엥 진짜? 그건 또 몰랐네.”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확실히 음식도 맛있었고 매장 분위기도 좋았다. 다정이와 둘이 갔으면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느긋하게 음식과 술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다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장 상사만 아니었어도 애초에 그 자리를 단번에 거절했을 터였다. 그러나 다정은 그 정도 일에 아쉬워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더 중요했다.


“그럼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글쎄… 지금 딱히 입맛이 없어.”

“그래도 간단한 거라도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음…”


승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정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다정은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계속되는 고민에 입맛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승태는 잠시 고민하더니 집에 가서 라면이라도 먹을지 물어봤고 다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태네 집에 오자마자 다정은 곧바로 쇼파에 몸을 던지며 널부러졌다. 승태는 빠르게 라면을 끓여 왔다. 샛노란 노른자가 라면 한 가운데 봉긋하게 올라와 있었다. 승태가 끓여 주는 라면은 항상 맛있었지만 이번 만큼은 너무 지친 탓인지 그렇게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음식을 먹고 있는구나. 그 정도 기분이었다.

라면을 다 먹은 후 승태는 냄비와 그릇을 대충 싱크대에 담가두고 여전히 널부러져 있는 다정의 옆에 앉았다. 자신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고민이기에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승태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난 게 하나 있었다.


“다정아 우리 여행 갈래?”

“여행?”

“응. 왜 저번에 나 할머니 돌아가시고 힘들었을 때 너랑 여행 갔다 오고 괜찮아졌잖아. 너도 여행 갔다오면 생각 정리도 좀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하… 승태야 미안한데 나 지금 여행 갈 기분도 아니고 가서 놀만큼 여유가 없어.”

“그래도 갔다 오면 좀 괜찮아질 텐데…”

“그냥 나 좀 내버려둬. 생각 정리 좀 하게.”

승태는 말을 듣는 순간 울컥했다.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뭐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줄 수 있잖아. 그렇게 말했어야 했냐구.”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안 그래도 힘든데. 나 집에 갈래.”


승태는 다정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다정은 벌떡 일어나 대답 없이 노트북을 챙겨 승태네 집 밖으로 나왔다. 짜증이 잔뜩 섞인 발걸음으로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너무 힘들고 지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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