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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Nov 23.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4

집에 온 이후에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뒤로 며칠 동안 출근을 하면서도 다정은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승태에게 전화로 내가 너무 예민했다고 말은 했지만 그냥 그때 예민하게 굴었던 것에 대해 사과만 했을 뿐 본질적으로 둘의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다정은 지금 승태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승태에게 자세히 얘기하지 않은 다정의 탓도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배려해 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정 씨 잠깐 볼까?]


메신저로 날아온 대표님의 짧은 메시지였다. 다정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다정은 대표실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 다정 씨 내가 생각해 보라는 건 좀 해봤어?”

“아뇨…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매출이 너무 안 좋아. 나도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떻게든 우리 직원들 계속 데려가고 싶은데 맘처럼 쉽지가 않네.”

“네… 알죠…”

“다정 씨는 우리 회사가 첫 회사잖아. 앞으로 더 커리어도 쌓을 수 있고. 더 큰 물에서 놀아야지.”


다정은 그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하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 담아 삼키고는 짧게 대답했다.


“네… 그렇죠.”

“그래요. 뭔가 새로 결정되면 꼭 알려줘. 이만 가봐.”

“네, 대표님.”


사실상 권고 사직과 별 다를 게 없었다. 한 대리를 포함한 같은 팀 사람들도 이 상황을 알고는 있겠지만 다정의 눈치를 보며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당장 퇴사를 하고 쉬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다정은 무엇보다 커리어가 끊기는 게 싫었다. 퇴사를 하고 쉴 만큼 여유롭게 돈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었다. 쉬는 동안 업무 감각이 떨어지는 것도 싫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마냥 쉬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는 언제까지 근무하고 그만 출근해도 된다고 정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다정의 상황을 최대한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를 단박에 내팽개치고 뛰쳐 나갈만큼 책임감 없이 행동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승태는 물론 부모님도, 친구들도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말하지도 않았다. 번듯한 직장으로 다시 이직에 성공하고 그때 가서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웃으며 얘기하고 싶었다. 다들 먹고 사느라 바쁠 텐데 괜히 내 일까지 신경쓰고 눈치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다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퇴근을 하고 회사를 나오니 밖에는 아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곡우의 비가 진짜로 풍년을 가져올지 확인하려면 가을까지는 기다려야겠지. 집까지는 또 언제 가나. 그런 시덥잖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서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다정! 퇴근했어? 이제 뭐해?”

“응. 뭐하긴 집에 가야지.”

“나 너네 회사 근처인데 한잔 할까?”

“음… 그럴까?”

“그럼 회사 앞으로 갈게 잠깐만 기다려!”


서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사실 딱히 술을 마실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는 역시 마셔줘야지 하고 다정은 생각했다. 승태는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는지 연락도 없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있는 와중에 조금 늦게 퇴근한 한 대리가 다정을 불렀다.


“다정 씨 아직 집에 안 갔어?”

“아, 네. 친구가 이 근처에 있다는데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친구? 승태 씨 아니고?”

“네. 대리님 이제 들어가세요?”

“어, 나도 퇴근해야지. 봄인데 무슨 비가 이렇게 오나 몰라.”


한 대리는 손에 버젓이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정작 우산을 펴고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안 가세요?”

“어어, 가야지. 다정 씨. 괜찮을 거야. 힘들면 언제든 얘기하고.”

“네? 아… 네. 감사합니다.”


한 대리는 어떻게든 위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다정의 마음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쨌든 저 사람은 남고 나는 떠나야 해. 그 생각이 다정에게 흘러 들어오는 한 대리의 말을 쳐냈다.

그렇게 잠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서연이 다가와 다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야! 뭐해?”

“왔어? 그냥 멍 때리고 있었어.”

“승태랑 있으려나 싶긴 했는데 오늘은 둘이 안 만나나봐?”

“응, 아직 퇴근 못한 것 같아. 연락 없는 거 보면.”

“오히려 잘됐지 뭐. 가자가자. 비 오는 날은 역시 전이지?”

“그래, 좋아.”


다정은 서연이 펴주는 우산 아래에서 서연의 팔짱을 끼고 최대한 비에 젖지 않게 밀착해서 근처 전집으로 걸었다. 빗물이 찰박거리며 다정의 양말을 조금씩 적셔갔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저 갑자기 회사 앞까지 찾아온 서연이 다정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다정과 서연은 전집으로 들어가 김치전과 감자전, 소주와 막걸리를 주문했다.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를 먹어줘야 한다며 몇번이나 다정을 설득했지만 다정은 기분이 이렇다 보니 막걸리 보다는 소주가 더욱 절실했다.

메뉴는 빠르게 나왔다. 노릇한 감자전과 불그스름한 김치전이 적당히 바삭하게 익어 좋은 향을 풍겼다. 서연은 주전자에서 막걸리를 주르륵 부어 잔을 채우고 다정은 익숙하게 소주병 뚜껑을 따고 꼴꼴꼴 잔을 채웠다. 각자의 잔을 채우고는 시원하게 잔을 부딪혔다.

서연은 오늘 연차를 내고 하루 종일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전시회도 보러 갔다가 팝업스토어에 가서 쇼핑도 했다며 사온 키링이나 인형들을 자랑했다. 그중에 특히 다정이 탐 나는 키링이 있어서 너무 귀엽다고 리액션을 했더니 서연이 선뜻 주겠다고 했지만 다정은 괜찮다고 손사레쳤다. 다정은 서연이 늘 혼자서 이렇게 문화 생활을 즐기러 돌아다니는 걸 볼 때마다 신기해 했다. 다정은 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왠지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매번 포기했었다.

이런 저런 시덥지 않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술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특히 서연은 술 마시는 템포가 빨라서 다정은 빠르게 술에 취했다. 도중에 화장실도 다녀 오고 전도 먹었지만 서연의 주량과 템포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근데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으응?”


그렇게 술이 취했을 때쯤 서연이 다정에게 물었다. 다정은 갑자기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냥 뭔가 지쳐 보이는 것 같아서.”

“아니야아, 별일 없어.”

“왜 혹시 승태가 뭐 잘못했어?”

“박승태! 이놈 시키!”


다정은 술잔을 쾅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주절주절 얘기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어렵다는 이야기, 그냥 퇴사를 해도 되는데 커리어가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그러다보니 이직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이런 자기 상황을 그냥 아무렇지 않아 하는 승태 이야기까지 다정은 쉼없이 쏟아냈다. 서연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그냥 가만히 들으며 가끔씩 리액션만 하다가 승태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승태가 이 상황을 아는 데도 그렇게 무신경하다고?”

“아니이, 승태는 다 몰라. 내가 말 안 했거든.”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멍청아.”

“근데에, 어차피 말해도 지가 뭐 어떻게 할 거야아… 해줄 수 있는 게 없잖아.”

“너 진짜 왜 이렇게 답답하냐 어휴.”

“뭐가아. 너까지 왜 그러는데에.”

“너 말대로 어차피 승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근데 넌 지금 승태가 옆에서 위로해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안 주는 거잖아.”

“그런가아… 몰라아. 나 화장시일.”


다정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술에 잔뜩 취해 어지러운 와중에도 화장실에 가는 동안 서연이 했던 말을 되새겨봤다. 사실 맞는 말이었고 다정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괜히 투정 부리고 있다는 것도, 승태가 그걸 받아줄 기회 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 혹시 승태가 의지가 안 되나? 아닌데. 우리가 같이 논 세월이 얼만데. 분명 다정이 이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때마다 승태가 어떻게 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술 많이 마셨어?”


화장실 문을 힘겹게 여니 그 앞에 승태가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다정의 손을 잡고 다정이 자신에게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안아줬다. 승태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술에 취해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다정을 승태는 잠시 동안 가만히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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