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은 승태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정과 서연이 있던 자리에는 서연 혼자서 술병을 조금씩 비워내고 있었다. 승태는 서연의 바로 맞은편에 다정을 앉혔고 다정은 자리에 앉자마자 벽에 기대 잔뜩 취한 숨을 몰아쉬었다.
“너도 한잔 할래?”
“어, 고맙다 서연아.”
승태는 다정이 마시던 잔을 받아 들어 서연이 따라주는 소주를 받았다. 다정은 기분이 꽤 좋은 듯 베실거리며 웃고 있었고 승태와 서연은 그런 다정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 있었다.
“그래도 빨리 왔네?”
“어, 오늘 야근했는데 집 가는 길에 마침 이 근처 역 지나고 있었거든.”
“타이밍이 좋았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취한 거야?”
“신나서 먹더니 순식간에 저렇게 됐어.”
“어휴…”
“다정이 요즘 많이 힘든가 보더라.”
서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서연의 잔도 어느새 소주잔으로 바뀌어 있었다. 승태는 혼자 잔을 비우는 서연을 한번 봤다가 어느새 잠이 든 다정을 한번 봤다가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함께 잔을 비웠다. 소주의 쓴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도 알아.”
“너는 다 모르는 거 같은데.”
“내가 뭘 몰라.”
“다정이가 너한테는 다 얘기 못하겠다고 했거든.”
“엥? 대체 뭘?”
“너도 대충은 알텐데?”
“요즘 고민이 있긴 한 거 같긴 해. 얼마 전에 기분 풀어주려고 여행 가자고 했다가 싸웠거든.”
“많이 예민해 보이더라. 알잖아 너도.”
승태는 다시 잔을 채우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도 다정은 진로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아 했었다. 일단 들이대고 부딪혀 보는 승태와 달리 다정은 이것 저것 재보고 난 다음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때도 승태는 다정을 위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거나 위로를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단순히 친구 사이가 아니라 연인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더 힘이 되어주고 싶고 더 함께하고 싶은 승태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관계가 변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승태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그냥 옆에만 있어줘. 그게 최고야.”
“그런 게 어딨어.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걸 찾아야지.”
“네가 뭘 어떻게 해줄 건데. 다정이도 나한테 그러더라. 어차피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얘는 늘 그런 식이지.”
승태는 벽에 기대 잠들어 있는 다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은 잠시 뒤척이더니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깼어? 집에 가자.”
“우웅… 어지러워…”
“그러게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몰라, 너 미워.”
“알았어. 일단 가자.”
승태는 다정의 짐을 챙기고 다정을 일으켰다. 서연도 뒤따라 일어나며 계산을 할 테니 나중에 보내 달라는 말과 함께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다정은 승태의 팔을 꼭 붙잡고 승태를 따라 술집 밖으로 나왔다. 습한 늦봄의 바람이 다정을 살짝 흔들었다.
서연이 먼저 집으로 가고 난 후에 뒤이어 택시를 잡고 다정의 집으로 향했다. 승태네 집이 거리상으로는 더 가까웠지만 이정도로 술에 취했다면 다음날 기억을 하지 못할 게 뻔했고, 그런 상황에서 눈을 떴는데 자신의 집이 아니라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다. 뭣보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까 다정의 집으로 가는 게 이래 저래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가 열심히 다정이네 집으로 향하는 동안 다정은 승태의 어깨에 기대 잠에 들어 있었다. 승태는 그런 다정을 보며 아까 서연이 했던 말을 떠올려봤다. 그냥 옆에만 있어주면 된다. 과연 다정이도 그렇게 생각할까? 내가 알아서 뭔가를 해주길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고민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힘이 되어 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승태는 다정의 손을 깍지 껴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다정의 엄지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당연히 옆에 있어 주지.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언제든 옆에 있어 줄 테니까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해. 네가 원하면 그냥 가만히 옆에만 있어 줄게. 그 마음이 손가락을 타고 다정에게 들어가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정의 집 앞에서 택시가 멈춰섰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다정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다정은 눈을 비비며 택시에서 내려 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승태도 다정을 따라 들어가 다정이 무사히 침대에 누울 수 있게 도왔다. 승태가 세수는 하고 자야 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다정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승태는 부엌으로 가 찬물 한 잔을 떠와 다정에게 건넸다. 다정은 물 한컵을 벌컥벌컥 원샷 하더니 협탁에 잔을 쾅 하고 내려 놓고 다시 누웠다.
그렇게 잠시 동안 다정은 말 없이 누워만 있었고 승태는 그런 다정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침대에 걸터 앉아 다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잠깐 이러고 있다가 다정이 잠들면 집에 가려고 했던 승태는 자세를 고쳐 앉을 때마다 다정이 옷깃을 붙잡는 바람에 한참 동안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나 가지마?”
“…ㅈ마…”
“응?”
“…가지마…”
다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승태를 아련하게 붙잡았다. 마치 어딘가 멀리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는 듯한 목소리였다.
“가긴 어딜가.”
승태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다정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자마자 다정은 몸을 돌려 승태에게 안겼다. 승태는 그런 다정을 안아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다정의 뜨거운 숨이 승태의 옷을 뚫고 가슴에 와 닿았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
다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승태는 그런 다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아니야. 나도 괜히 짜증 내서 미안해.”
“회사에서 나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가 없대. 사정이 너무 어렵대. 어리니까 어디 가서도 잘할 거래.”
“그럼. 우리 다정이 어디서도 잘 하잖아.”
“근데 그게 말처럼 쉽냐구. 이직하는 것도, 적응하는 것도 그렇게 말처럼 쉽냐구. 왜들 그렇게 쉽게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힘들어 하는지 몰랐어. 그것도 모르고 난 그냥 기분전환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만 했네.”
다정은 또 한동안 말없이 안겨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여유를 갖고 정리해 볼게.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그러기만 해도 힘이 되니까.”
승태는 다정이 힘든 순간에 자기가 옆에 있어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자신이 다정에게 있어서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되는 존재가 됐다는 것에 기뻤다. 그래서 승태는 스스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다정의 옆에서 그저 묵묵히 걸어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승태가 대답이 없자 다정은 그제야 승태에게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승태를 바라 보았다. 승태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다정은 눈빛으로 왜 대답 안 하냐고 쏘아보았고 승태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바보야.”
승태가 다정을 바로 눕히며 다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무방비로 누워 있는 다정에게 승태는 잠시 동안 아주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순간 다정의 술기운이 다시 한번 온몸에 퍼지며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