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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Dec 01.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7

여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가 지나고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소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이미 날씨는 반팔을 입고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후텁지근했다. 각 계절별로 그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는 항상 있어 왔지만 유독 여름의 시작은 유난히 빠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승태는 출근을 해서도 틈이 날 때마다 다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정은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한 뒤로 거의 제 집 드나들 듯 승태네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 많아졌다. 물론 승태도 다정의 집에서 종종 자고 가곤 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되는 건가. 일을 하는 중에도 승태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다정과 같이 살기 싫다거나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결단코 단 한번도 없다. 물론 각자의 생활 방식이 다르니 어느 정도 충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쯤은 분명 사랑으로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승태는 집을 어떻게 합쳐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각자가 살고 있던 자취방이 있으니 한쪽을 정리하고 나머지 한 명의 집에 가서 사는 게 좋을지, 아니면 둘 다 집을 정리하고 같이 살 새로운 집을 구하는 게 좋을지도 고민해야 했다. 다정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같이 살 집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너네 집에서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냐? 너네 집 정도면 넓잖아.”

“하긴 우리 집 아직 계약도 좀 많이 남았고…”


승태는 혁준과 저녁을 먹으며 그동안의 일을 얘기했다. 혁준은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커플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자기 주변에서 실제로 동거를 하는 커플을 보게 될 줄은, 그것도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근데 너네 안 싸우겠냐? 아무리 사이 좋은 커플들도 동거하면 세상 그렇게 싸운다던데.”

“에이, 걔네랑 우리랑 같냐. 애초에 우리는 커플이기 이전에 9년째 친구인데.”

“그래 뭐. 너네가 장난기가 좀 있어서 그렇지 서연이처럼 성격이 지랄 맞지는 않으니까.”

“그럼그럼. 근데 넌 말끝마다 꼭 서연이 욕을 붙이더라.”

“김서연 걔는 진짜 내가 사람 만들어 놨지.”

“서연이도 아마 똑같이 생각할걸?”

“닥쳐.”


혁준은 병을 흔들어 보이더니 병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술을 한 병 더 주문했다. 직원 분이 술을 가져오는 짧은 시간 동안 승태는 다정에게 메신저로 지금의 상황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다정에게 전화가 왔다.


“응. 퇴근 했어?”

“응 드디어 했어 퇴근… 어디야?”

“우리 아까 얘기했던 고기 집에 아직 있어.”

“아 그래? 그럼 나도 갈래!”

“그럴래? 야 혁준아. 다정이 온대.”

“뭐야? 그럼 김서연도 불러. 넷이 먹자.”


혁준의 말을 스마트폰 건너 들은 다정이 서연에게 연락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는 마무리 되었다. 다정과 서연은 3, 40분 사이에 도착한다고 했고 승태와 혁준은 먹던 것만 마무리 하고 자리를 옮기며 둘을 기다리기로 했다.


“승태야!”


예상했던 시간보다 다정이 조금 일찍 도착해 마침 2차로 옮기고 있던 승태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리고 때마침 서연도 반대쪽 방향에서 혁준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넷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근처 이자카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빠르게 주문을 마친 서연이 승태와 다정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맞다. 너네 같이 살 거라며?”

“아직 확정은 아니야. 승태한테 답을 못 들었거든.”

“뭐야뭐야. 박승태 왜 튕겨?”

“튕기는 게 아니라 다정이가 고민해 보라고 해서 그냥 고민하는 척 좀 해본 거야.”


서연이 타겟을 승태로 바꾸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승태는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근데 너네 안 싸우겠어? 커플들 같이 살면 많이 싸운다던데.”

“너도 혁준이랑 똑같은 얘기 하네.”

“뭐? 야 최현준 너 왜 나 따라해.”

“네가 날 따라 한 거잖아 멍청아.”

“하 기분 나빠.”


서연은 옆에 앉은 혁준을 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 혁준은 아픈 팔을 부여잡으며 서연을 노려봤지만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승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같이 살 거야?”

“비밀인데?”


승태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서연을 놀리자 이번엔 다정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승태를 쳐다봤다. 당연히 같이 살 거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고민하는 척 하고 있었다더니?


“뭐야! 나랑 같이 안 살게?”

“장난이지 바보야. 같이 살자 나랑.”


승태가 다정의 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앞에서 그 장면을 코앞에서 직관한 서연과 혁준은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며 둘이서만 술을 털어 넣듯 마셨다. 다정과 승태는 그 모습이 웃겨 하마터면 수저를 떨어트릴 뻔했다.


“하… 뭔가 신기하면서도 부럽다. 너네가 동거를 하다니.”

“그니까. 나도 아까부터 계속 신기해 하던 중이야.”

“암튼 같이 살게 되면 집들이 한번 해야 하는 거 알지?”

“맞아! 집들이 해!”


다정과 승태는 이사하면 꼭 집들이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후로도 서연과 혁준은 승태와 다정에게 여러 좋은 말들을 해줬다. 와중에 서연은 승태에게 다정이 말 잘 들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를 했고 혁준은 그런 서연에게 너나 잘하라고 했다가 또 다시 몇 대 맞고 말았다. 그 외에 여러 현실적인 고민들도 같이 나눴지만 아직 아무 것도 정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에 큰 진전 없이 술자리가 마무리됐다.

승태와 다정은 나란히 손을 잡고 다정의 집으로 향했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초여름의 습한 바람이 두 사람의 손을 파고들려 했지만 아무래도 둘을 떨어트릴 수는 없었던 듯 유유히 다정과 승태 사이로 지나갔다.


“다정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일단 퇴사부터 해볼까 해.”

“바로 이직 안 하구?”

“응. 왠지 계속 일을 하고 있으니까 새 직장이 더 안 구해지는 느낌이야.”

“그럴 수가 있나…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퇴사하구 이사부터 해 놓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이직하려구. 어차피 모아 놓은 돈도 좀 있고 한두 달 정도는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어.”

“그럼 다행이구. 집은 어떻게 하지…”

“내가 너네 집으로 들어갈까?”


다정이 승태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너네 집은 어떻게 하구?”

“아 내가 얘기 안 했나? 거기 우리 삼촌 집이야. 삼촌이 그 건물 주인이거든.”

“뭐!?”


승태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다정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는 표정으로 승태를 쳐다봤다.


“내 주변에 건물주 친척 있는 사람 처음 봐…”

“그렇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는 아니야.”

“서울에 건물을 갖고 있다는 거 자체가 부자인 거야 바보야.”


다정은 정말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승태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승태는 태연한 다정의 표정이 더 놀라웠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촌한테 얘기해서 우리 집에 같이 살면 좋은데 그러기엔 집이 좀 좁아. 위치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다정은 말을 하다가 중간부터는 말끝을 흐렸다. 승태는 다정의 말에 더 집중하기 위해 잡은 손을 당겨 다정 쪽으로 더 붙어 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살던 공간에 내가 들어가는 게 뭔가 설레고 기분 좋아.”


그 말을 들은 승태는 다정이 왜 같이 살자고 먼저 얘기를 꺼냈는지, 그리고 왜 승태 집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승태는 다정의 팔에 팔짱을 끼우며 답했다.


“나도 좋아.”


승태는 앞으로 다정과의 관계가 조금이든 많이든 어떤 변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그런 느낌은 다정도 함께 받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던 기분 좋은 밤, 둘은 여전히 나란히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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