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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Dec 07.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8

망종이 오면 농부들은 다 익은 보리를 먹고 새로 벼를 심는다. 한 해의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날짜상으로는 6월 초, 여름이 이제 막 시작되는 시기이자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작이 되는 그런 시기이기도 하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물러가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에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곧이어 장마도 찾아오겠지만 가벼운 옷차림 덕에 부지런히 활동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시기가 된 것이다.

다정은 5월 말까지만 출근을 하고 마침내 1년 반 조금 넘게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를 했다. 다정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까지 사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이번 퇴사를 권고사직으로 처리해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게 처리해줬다고 했다. 마냥 쫓아낼 때는 그렇게 밉상일 수가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잘 처리되니 꽤 괜찮은 회사였다고 뒤돌아보게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승태는 그 말을 들으며 다정이 그만큼 일을 잘 해왔고 그래서 그만큼 인정을 받은 것이라는 말로 다정을 토닥여주었다.


“퇴사도 했겠다. 이제 짐을 조금씩 옮겨 볼까?”

“바로 옮기게? 지금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안 그래도 삼촌한테 물어봤는데 여유 좀 줄 테니까 천천히 빼도 된대.”

“아 그래? 그건 다행이네.”

“응. 그래서 작은 짐부터 천천히 너네 집으로 옮기려구.”


퇴사를 하자마자 다정은 자기 집에 있던 짐을 하나씩 빼서 승태네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다정은 가볍고 소중하면서 당장 지금 사는 데 필요한 물건 부터 하나씩 옮겼다. 화장품, 세면도구, 옷 몇 가지와 노트북 등을 승태와 함께 캐리어를 들고 나르며 승태네 집을 채워갔다.

승태도 물론 다정이 짐을 들이는 동안 침실과 작업실을 나름대로 개조해 나갔다. 작업실은 기존에 외주 작업을 하는 용도로 썼던 방이었는데 그 방의 작업 공간을 한쪽 벽으로 몰아 넣고 다정이 옷을 걸어놓을 수 있게 2단 행어를 설치해줬다. 그리고 작업 공간에는 다정이 쓸 수 있도록 작은 책상을 하나 더 놓고 다정의 노트북을 올려줬다. 침실은 원래 혼자 쓰던 것을 둘이서도 쓸 수 있도록 잡다한 것들은 작업실에 다 밀어넣고 침대와 협탁, 이동식 TV로만 소박하게 구성했다.

그렇게 2주 동안의 짐 정리가 끝나던 날, 다정과 승태는 저녁에 피자를 한 판 시켜 소주를 곁들였다. 노릇하게 익은 콤비네이션 피자에 소주의 조합은 다정과 승태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대학 때 이 조합 때문에 친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들 보통 피자에는 맥주를 먹지 않냐며 다정과 승태를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피자에 진정 어울리는 술은 소주라며 하이파이브를 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둘러 보니까 진짜 둘이 사는 집 같네.”

“그러게. 확실히 물건들이 섞여 있으니까 같이 사는 느낌이 확 들어.”

“자,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좋아!”


승태가 선창을 하며 잔을 들자 다정도 미소지으며 잔을 들고 부딪혔다. 술을 한잔 털어 넣고 피자를 한입 먹으며 마주 앉아 피자를 먹고 있는 다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친구에서 시작해 이렇게 여자친구가 되어 같이 살게 되기까지 우리 인연이 깊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순간 이보다 더 깊은 인연으로도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다정은 그런 승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 하며 뭘 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승태는 아무말 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피자와 술을 다 먹고 알딸딸한 상태로 잠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화장실에 서서 양치를 했다. 다정이 반쯤 눈이 풀려 양치하고 있는 모습이 세상 귀여워 옆구리를 콕 찔렀다가 괜히 한 대 얻어맞았지만 승태는 기분이 좋았다. 양치를 다 마치고 나서는 나란히 침실로 돌아와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벽 쪽에는 승태가, 그 옆에는 다정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잠 들기 전 마지막으로 각자의 스마트폰을 잠시 확인하다 다정이 먼저 화면을 끄고 승태쪽으로 움직였다. 그제야 승태도 스마트폰을 덮어두고 왼팔로 다정에게 목베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오른팔로 다정의 허리를 감싸니 다정이 승태의 품으로 자연스럽게 파고 들었다. 승태의 얕은 숨이 다정의 이마에 와 닿았다. 그렇게 술기운이 은은하게 온몸으로 퍼지자 금세 잠이 몰려왔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이 밝았다. 창을 타고 초여름의 햇살이 이불 위에 내려 앉아 온기를 더하고 있었다. 점점 더워져 승태가 잠에서 깨보니 다정은 여전히 승태의 품에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다정이 깨지 않게 조심히 스마트폰을 챙겨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오고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잔 마셨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집 안에 희미하게 다정의 숨소리가 들리니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이었다.


“다정아 더 잘 거야?”

“으음… 일어났어? 몇 시야…?”

“9시야.”

“쫌만 더 자자…”


다정이 승태의 손을 잡고 다시 침대 안으로 끌어들였다. 승태가 침대에 눕자 마자 다정이 승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정의 몸을 감고 있던 이불 속 온기가 승태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배 안 고파? 언제 일어나려구.”

“일어날 거야… 배고파…”


승태는 다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확실히 요 몇 주간 짐 옮기느라 힘들었지. 다정은 조금씩 잠이 깨는지 겨우 눈을 뜨고 승태에게 물었다.


“근데 집에 먹을 거 없지 않아?”

“아 맞다. 집에 라면 밖에 없는데…”

“그럼 라면으로 해장하고 이따 장 보러 갈까?”

“그러자. 얼른 일어나.”


승태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라면 물을 올리고 물이 끓는 동안 계란과 다정이 좋아하는 치즈를 꺼내고 그릇과 수저를 세팅했다. 그런 순간 마저도 수저 한 쌍이 아닌 두 쌍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 사이 다정은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식탁에 앉아 유튜브로 영상을 봤다. 집안의 침묵이 사라지니 사람 사는 집의 느낌이 났다.

금세 라면이 다 익어 식탁에 올라왔다. 잘 풀어진 계란과 어우러진 국물, 알맞게 익은 라면과 그 한 가운데 녹아내린 치즈까지 확실히 먹음직스러웠다. 다정과 승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앞접시에 가져와 먹었다.


“하 배부르다. 역시 승태 라면 잘 끓이네.”

“그럼그럼. 쉬고 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할게. 네가 라면 끓였잖아.”

“그래주면 고맙지.”


라면을 다 먹고 나서 불러오는 배를 만족스럽게 쓸어내린 다정이 일어나 그릇과 수저, 냄비를 싱크대로 가져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승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설거지를 다 마치고 나서는 쇼파에 나란히 앉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승태가 생일 때 다정에게 선물 받은 커피머신으로 커피도 한잔 내려주고 지난 번에 먹으려고 사뒀다가 아직 못 먹은 과자도 한 봉지 뜯어 먹었다. 해가 점점 중천까지 떠오르면서 햇살이 점점 더 따뜻하게 거실 안쪽까지 들어왔다.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쉬다가 오후에 장을 보러 나가기로 했다. 다정은 씻기 귀찮다며 잠옷 위에 커다란 후드집업을 걸쳐 입더니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 모습을 본 승태는 벌써 동네 주민 다 된 거냐며 크게 웃었다. 다정은 이상하냐며 거울로 이리저리 확인해봤지만 딱히 이상할 만한 데는 없었다. 그저 너무 적응이 빠른 게 스스로도 너무 재밌었을 뿐이다.

마트는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다정과 승태는 바구니를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마트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라면과 계란, 치즈를 담고 술도 넉넉하게 담았다. 마실 때마다 사오면 되지 않느냐고 승태가 물었지만 다정은 귀찮다며 그냥 집에 갖다 놓고 먹자고 했다. 시켜 먹을 만한 게 없을 때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파스타와 스테이크, 삼겹살과 카레, 짜장 같은 것들도 바구니에 담았다. 한번에 이렇게 많이 사면 다 들고 갈 수 있냐며 승태가 걱정했지만 다정은 끄떡없다며 거침없이 과자와 간식들도 담았다.


“오와… 이거 생각보다 무겁네. 너네 집이 오르막 위에 있다는 걸 잊었어…”

“이리 줘. 내가 들게.”

“오~ 박승태 좀 듬직하네?”


다정은 장 본 것들을 담은 봉투를 들고 승태네로 가는 오르막을 오르던 다정이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승태가 다정이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 들고는 낑낑거리며 올라가자 다정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승태는 약이 올랐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집에 돌아와 장 본 것들을 자리에 맞게 정리하고 나서는 다시 침대로 돌아웠다. 후드집업과 모자를 벗어 걸어 놓으니 다정은 다시 아침에 봤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정이 이불을 걷고 누우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걸 보고 승태는 다정의 옆으로 가 다정의 팔을 베고 누웠다. 이 팔베개라는 것이 생각보다 편하진 않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냥 이렇게 다정과 붙어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상이 계속 되겠구나 하고 승태는 생각했다. 주말 아침에는 밥도 대충 먹고 커피나 한잔 하며 평화롭고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겠지. 승태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이럴 거면 진작에 같이 살자고 할걸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정을 빤히 바라봤더니 다정은 뭘 보냐며 이마를 탁 하고 쳤다.

그렇게 쉬고 있는 중에 다정의 스마트폰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다정은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를 받으며 작업실로 갔다. 누구 전화길래 갑자기 나가서 받지? 왠지 모를 불안과 긴장이 감돌고 있을 때 빠르게 전화를 마무리하고 다정이 방으로 돌아왔다.


“무슨 전화야?”

“응? 아, 엄마.”

“어머니?”

“응. 저녁은 집에 와서 먹으라네.”

“아… 그래?”

“응. 근데 너도 오라는데?”

“나도?”


승태는 깜짝 놀라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의 호출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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