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어릿 Dec 08.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9

준비를 마친 승태는 긴장한 표정으로 다정이네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부르신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러고보니 다정은 같이 살자고 얘기한 다음부터 짐을 다 옮길 때까지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렸는지에 대해 단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고 계셨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승태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긴장 좀 풀어. 그냥 진짜 저녁 먹재. 우리 엄마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사실 맞는 말이었다. 대학생 때 워낙에 술을 자주 먹다 보니 다정이 취하면 집에 데려다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은 대부분 승태가 맡았었다. 처음에는 무슨 갓 성인 된 애가 술을 이렇게 먹고 다니냐며 걱정하시던 어머니였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변함 없이 다정은 술을 많이 먹고 승태는 변함 없이 다정을 집에 데려다 주니 그때부터는 어머니도 오히려 승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데려다 주는 걸 걱정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혁준이 다정을 집에 데려다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어머니가 승태 어디갔냐고 물어보셨다고도 했다. 모르는 사이에 승태가 다정의 어머니에게 좋은 인상을 준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 나왔어!”

“안녕하세요 어머니!”


다정의 본가에 도착해 다정이 먼저 들어가며 밝게 인사했다. 승태도 뒤따라 들어가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이미 저녁 준비가 한창이신지 집 안에는 불고기 냄새가 가득했고 부엌에는 고기를 굽는 소리가 지글거리며 나고 있었다.


“아이구 승태 왔어? 애가 왜이렇게 말랐니. 밥은 잘 먹고 다녀?”

“네 어머니. 너무 오랜만에 뵙죠?”

“엄마, 딸래미 왔다구. 나 안 보여?”

“넌 자주 오잖아. 다정이 졸업하고 나서는 처음 보지? 얼른 와 밥먹자. 여보! 애들 왔어 나와서 밥 먹어! 다정아 가서 아빠 좀 불러와라.”

“너무해 진짜.”


승태는 어머니가 그 짧은 순간에 다정이에게 한마디 하고 승태의 안부를 묻고 아버지까지 부르시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어머니들은 다 똑같구나 하고 생각을 하며 식탁에 앉았다. 매번 올 때마다 잠깐씩 인사를 드리거나 간식을 얻어 먹은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려고 하니 새삼 어색하기도 했다.


“승태 왔니? 점점 애가 마르는 것 같네.”

“안녕하세요. 아니에요. 잘 챙겨 먹고 다녀요.”

“그럼! 내가 얼마나 잘 챙겨 먹이는데!”

“네가 다 뺏어 먹는 거 아니고? 넌 좀 쪘네 딸.”

“나 이 집 딸 맞냐구!”


다정은 아버지와도 티격태격하며 승태의 옆자리에 앉아 괜히 승태를 노려봤다. 승태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 몇번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화목한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반찬들을 한상 가득 차려주셨다. 불고기부터 시작해서 된장찌개와 각종 나물 반찬, 계란후라이와 김치 등 집밥의 정석이라고 할만한 반찬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한 숟갈 떠서 먹어봤는데 그냥 흰 쌀밥인데도 평소 먹던 것과 달리 맛있었다. 밥을 시작으로 승태는 온갖 반찬들을 쉬지 않고 거의 마시듯이 먹었다.


“얘 체하겠다. 솔직히 말해봐. 다정이가 너 먹을 거 다 뺏어 먹지?”

“아니에요. 진짜 저 잘 챙겨 먹어요. 집밥이 너무 오랜만이라…”


승태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입에 있던 걸 빠르게 씹어 삼키고 대답했다. 그러고 또 다시 열심히 밥을 먹고 있으니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 다정이까지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승태가 다정이 가족들의 시선을 느낀 건 밥 한 공기를 거의 다 비워갈 때쯤이었지만.


“한 그릇 더 먹을래?”

“네, 어머니. 반찬이 지인짜 맛있어요!”

“우리 엄마 요리 진짜 잘하지?”


승태가 두 번째 밥을 받아 들고 다시 열심히 먹기 시작하고 나서야 다정이네 가족들도 평소와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엄마의 잔소리와 그걸 받아치는 아빠의 핑계,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부모님의 잔소리를 독차지 하는 딸, 승태는 그런 모습을 보며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애초에 밥 먹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필요한 대화 이상을 많이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성인이 되면 부모님과 술도 한잔씩 하면서 학생일 때보다 더  친해진다고 하던데 대학에 오면서부터 서울에 살았던 승태로서는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승태네 부모님은 그렇게 술을 즐기시는 편이 아니었으니 공통된 대화 주제가 없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네 같이 산다며?”

“응, 계속 짐 나르느라 고생고생 다했어. 어제 겨우 짐 정리 끝냈어.”

“아빠 부르지. 옮기는 것 좀 도와줬을 텐데.”

“됐어. 아빠도 힘든데.”


승태는 의외로 자연스러우면서도 태연하게 흘러가는 대화를 듣고 약간 놀랐다. 승태가 다정이네에 오면서 긴장했던 이유가 혹시나 다정이네 부모님이 우리가 같이 사는 걸 반대하시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도 안하고 남자친구랑 같이 산다는데 아무리 오픈마인드인 부모님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은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승태의 예상은 오늘의 대화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승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다정이네 부모님은 훨씬 더 프리한 분들이셨다.


“승태야 네가 앞으로 고생이 많겠다. 저 기집애 진짜 청소도 안하고 주말엔 집에서 잘 씻지도 않는데…”

“아 엄마! 그런 얘기 안 해도 된다구!”

“여보, 그래도 딸래미 남자친구 앞인데 너무 흉만 보는 거 아냐?”

“뭐 어때 사실인데. 승태야 엄마는 바라는 거 없다. 그냥 쟤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고마워.”

“그래 승태야. 아빠도 마찬가지다. 대학 때도 쟤 술주정 받아주느라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아이고…”


다정이네 아버지는 그 말을 하시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고 웃음을 꾹꾹 참고 있던 승태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깔깔대며 웃는 승태의 허벅지를 다정이 퍽 하고 내리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모습이 흐뭇하다는 듯 바라보고 계셨다.

밥을 다 먹고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주셔서 후식까지 먹었다. 아버지가 한잔 하고 가겠냐고 물어보셨는데 애 처음 불러다가 술 먹이는 거 아니라고 어머니가 말리셔서 술은 못 먹게 되었다. 다정과 승태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눈치를 살살 보시더니 다음에 또 놀러 오라며 쓴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아참, 너희 이거 챙겨가라고 불렀는데 깜빡할 뻔했네.”

“뭔데?”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여러 개 꺼내 종이가방 가득 담아주셨다. 오늘 먹었던 모든 반찬들이 조금씩 소분되어 있는 반찬통들이었다. 승태는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냐고 말을 하면서도 했지만 점점 쌓여가는 반찬통과 함께 쌓이는 행복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요즘 젊은 애들 집에서 뭐 안 해 먹잖아. 엄마가 반찬 좀 쌌으니까 집에 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어.”

“우와! 감사합니다 어머니!”


승태는 어머니께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는 다정과 함께 다정의 본가에서 나왔다. 나오는 길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중 나오시며 다음에도 또 놀러오라며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아버지는 같이 한잔 못한 게 계속 아쉬우신지 어머니 뒤에 서서 손가락으로 잔을 만들어 보이며 승태에게 눈빛을 보냈다. 승태도 그 눈빛을 읽고 미소로 답을 드렸다.


“우리 집 왔다 가니까 기 빨리지?”

“아니 전혀? 근데 어머니 음식 진짜 잘하시더라.”

“그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먹고 자라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 집 놀러 오는 친구들은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

“새삼 부럽네… 아, 두 분 다 나를 되게 편하게 대해주셔서 좀 놀랐어.”

“그런가? 내가 너 얘기를 하도 많이 해서 그럴지도.”


다정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모님께 남자친구가 생긴 이야기, 그 남자친구가 승태라는 이야기, 승태와 같이 살게 됐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승태는 왜 그렇게 다정이 부모님이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대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다정이 승태가 좋은 사람이고 지금까지 친구로 지낸 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 네가 그렇게까지 했을 줄은 몰랐네.”

“그럼그럼. 나 생각보다 노력 많이 했다?”

“난 너무 자연스러우셔서 원래부터 그렇게 프리하신 분들인가 했어.”

“물론 기본적으로 우리 엄마 아빠가 프리한 편이긴 해. 그것도 그렇지만 생각보다 우리 부모님이 너 많이 믿고 계시더라구. 난 오히려 그것 때문에 놀랐어.”

“참 신기해. 뭔가 기분이 막 이상해.”


승태는 긴장이 풀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신기하고 기분 좋았던 오늘 하루를 생각하자 몸에 소름이 돋아 괜히 다정에게 장난을 쳤다. 다정은 하지말라고 맞받아치면서도 승태와 함께 웃었다. 그렇게 둘은 승태네 집이 아닌 함께 사는 그 집에 도착했다.

승태와 다정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를 정리하고 잘 준비를 했다.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나른함과 함께 행복함이 온몸을 휘감으며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근데 너네 부모님은 우리가 같이 사는 거 알아?”

“우리 부모님? 아니 아직 얘기 안 했어.”

“그래도 말씀 드려야 하는 거 아냐? 나중에 서울 올라오셨는데 놀라시면 어떡해.”

“우리 엄마 아빠 나 서울 올라오고 한번도 서울 안 오셨어.”

“음… 그래?”


다정은 승태의 말을 듣고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승태에게 최대한 내색은 안하고 싶었다. 타지에서 혼자 사는 아들이 궁금할 수도 있는데도 승태 부모님은 워낙 바쁘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으니 올라오기 힘드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놀아줄게!”

“좋아! 고마워 다정아.”


승태는 다정을 꼬옥 껴안았다. 다정도 승태에게 안겨 그의 등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다음 편은 아래 브런치북에 이어서 연재됩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9th-sprin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