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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Nov 16.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2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나도 몰라…”


승태와 다정은 다섯 발 정도 앞서 걷고 있는 김 주임과 한 대리 뒤를 따라 걸었다. 한 대리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일단은 따라가고 있긴 한데 도저히 생각을 해봐도 한날 한시에 서로의 직장 상사를 같이 만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 대리가 붙임성이 좋은 덕에 김 주임에게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 서로의 직장 상사와 함께 움직이자니 승태와 다정이 서로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고 한 대리와 김 주임을 붙여 놓자니 어색한 기류가 흐를 것 같았는데 의외로 한 대리가 김 주임을 리드해 데리고 다니고 있는 듯 보였다.


“한 대리님 저렇게 적극적인 사람인 줄 몰랐네.”

“회사에서는 안 저래?”

“안 저래.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사 사람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야.”

“그래?”

“응. 너네 김 주임님이 맘에 들었나본데?”

“저 사람 어디가 맘에 드는 거지…”


승태로서는 한 대리의 저런 적극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 주임은 회사에서 매번 능구렁이처럼 다가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처리는 누구보다 완벽하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너무 얄미웠다. 그러고보니 승태 역시 김 주임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 뭐해! 얼른 와 얼른!”

“네 네 가요!”


한 대리가 갑자기 휙 돌아보며 승태와 다정을 부르는 바람에 승태의 머릿속에서 김 주임에 대한 험담이 흩어져 사라졌다. 승태와 다정이 다시 가까워지자 한 대리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차 문의 잠금을 풀었다. 약간 낡긴 했지만 관리를 잘했는지 제법 깔끔한 느낌의 세단이었다.


“한 대리님 차 있었어요?”

“다정 씨 몰랐어?”

“몰랐죠! 출근할 때 항상 지하철 타고 오신댔잖아요.”

“아침에 운전하려니까 피곤해서 그런 거지. 나 운전한 지 꽤 오래됐어.”

“세상에…”


다정은 오늘 새로운 사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어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다. 회사 사람은 회사 안과 밖이 전혀 딴판이라고 하던데 이걸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근데 저희 차 타고 가야 할 정도로 멀리 가는 거예요?”

“아냐아냐, 이 근처인데 걸어가긴 좀 뭐해서. 타고 가면 편하잖아.”


다정의 질문에 한 대리가 핸들을 능숙하게 꺾으며 답했다. 실제로 차타고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한 대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예전에 가봤는데 맛있었다는 둥, 분명 나리 씨나 승태, 다정이도 좋아할 거라는 둥 쉬지 않고 오디오를 채웠다. 저 정도면 잠시라도 침묵이 이어지면 무슨 병에 걸리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한 대리는 말이 참 많았다. 역시나 회사에서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다행인 것은 쏟아지는 한 대리의 말에도 김 주임은 지친 기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정은 익숙한 사람에게서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봐서 그런지 벌써 기가 잔뜩 빨렸는데 김 주임은 그런 낌새가 전혀 없이 그저 능구렁이처럼 적절하게 리액션을 해주고 있었다. 저렇게 리액션을 해주니까 한 대리가 입을 안 다물지. 승태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 대리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스카이라운지에 위치해 전망이 탁 트인 이자카야였다. 와인 창고를 연상시키는 내부 인테리어는 모던하면서도 세련되었고 거기에 노란색 은은한 조명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이동한 넷은 승태와 다정이 함께 앉고 승태의 앞에는 한 대리가, 다정의 앞에는 김 주임이 나란히 앉았다. 같은 회사 사람끼리 앉아야 하나 했었지만 커플이 앞에 있기도 하고 여기가 회사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앉을 필요가 있냐는 한 대리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한 대리는 김 주임 옆에 앉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정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자리에 앉아 한 대리의 지휘 아래 순차적으로 메뉴를 골랐다. 김 주임이 이태리 해산물 스튜를 고르자 한 대리가 이거 진짜 맛있다며 신나게 리액션을 했다. 이어서 다정이 오코노미야끼를, 승태가 소고기타다끼를 주문했다. 술을 주문할 순서가 되어 다정이 자연스럽게 소주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한 대리의 강력한 항의를 더한 추천으로 각자 하이볼을 한 잔씩 마셔보기로 했다.


“한 대리님이 이런 데를 다 알고 계신 게 새삼 신기하네요.”


주문이 끝나고 다정이 가게 내부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한 대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정의 말을 받아쳤다.


“내가 이래 봬도 맛집을 좀 알아. 나리 씨는 어떠세요?”

“분위기가 되게 괜찮네요. 해 지면 야경도 잘 보일 것 같고.”

“그쵸! 왠지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순간 승태는 한 대리의 반짝이는 눈을 봤지만 모른 척했다. 김 주임은 그런 한 대리를 보며 싱긋 웃고는 창밖을 지긋이 응시했다. 한 대리도 김 주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아무 것도 없는 창밖이었지만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김 주임과 창밖을 바라 보고 있는지 아니면 김 주임의 뒤통수를 바라 보고 있는지 모를 한 대리의 모습을 보며 승태는 의외로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했다.

하지만 승태는 곧바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대리는 그렇다 쳐도 저 김 주임이 연애를 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다정의 표정을 슬쩍 보니 다정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이런 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주임과 한 대리는 서로를 알아가기 바빴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메뉴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맨 먼저 하이볼이, 그 다음엔 타다끼가, 이어서 오코노미야끼와 스튜가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테이블에 올라올 때마다 다정과 김 주임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한 대리는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리 씨는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소주로 반 병 정도 먹는 것 같아요.”

“술을 잘 못하시는구나. 저는 한 병 반 정도 마시거든요.”

하! 승태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회식 때 혼자서 세 병을 거뜬히 마시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던 걸 5번까지 세다가 말았는데 뻔뻔스럽게도 저런 거짓말을 하다니.


“승태 씨 왜 그래?”

“아니에요. 드세요 드세요.”


승태가 적당히 티 날 정도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김 주임은 승태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을 강렬한 눈빛으로 보내고는 다시 눈 앞의 음식과 술에 집중했다. 다정도 목이 타는지 하이볼 한 잔을 누구보다 빠르게 마셨다.


“승태야 나 소주 한 병만 시켜줘.”

“하이볼 마시고 바로 소주 마셔도 괜찮겠어? 더 취할텐데.”

“응. 괜찮아.”


승태와 다정은 그때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승태 씨가 확실히 다정 씨를 잘 챙긴다며 칭찬하는 한 대리도, 평소 같으면 얼른 병을 뺏어 자기 잔을 채웠을 김 주임이 부러운 눈빛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저 둘이 깨를 볶든 콩을 볶든 무슨 상관이겠어. 그냥 회사에서 봤던 모습과는 정반대인 이 모습들이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거북함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근데 다정 씨는 승태 씨 어디가 좋았어?”

“네?”

“그냥. 오랫동안 친구였는데 어떻게 사귀게 됐나 궁금해서.”

“아, 뭐 그냥…”


다정은 작년 겨울 승태에게 고백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하이볼과 소주에 섞여 다른 것들은 희미했지만 승태의 아련하면서도 확신에 찬 그 눈빛만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 짧은 순간 대학교 때부터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르는 한편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면 그 관계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말이 함께 떠올랐다. 그러나 다정은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정의되길 원했다. 지금까지의 승태가 변함 없이 자신의 옆에 있어주길 원했다. 그 누구도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어색해 하지도, 뭐라고 하지도 않는 그런 관계였으면 했다. 그리고 그게 승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만큼 앞으로 더 함께하고 싶어서요.”

“어머, 낭만적이다. 너무 멋진데?”

“이야. 다정 씨 최고다! 그럼 승태 씨는?”

“음… 저도 다정이랑 같은 이유에요.”

“뭐야, 시시하게. 자 다들 짠!”


한 대리의 선창으로 다들 잔을 부딪혔다. 알딸딸한 술기운과 함께 다정이 건넨 온기가 승태의 온몸 구석구석 퍼졌다. 적당한 배부름과 잔잔한 야경, 분명 거슬렸지만 이제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직장 상사들,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일어날까? 저희도 이제 빠져줄까요? 커플을 너무 붙잡아뒀네.“

“그럴까요? 승태 씨 미안~”

“아니에요.”


자리를 정리한 뒤 가게 밖으로 나와 승태와 다정은 한 대리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선선한 봄바람을 타고 한강의 벚꽃이 여기까지 날아왔다. 승태는 자연스럽게 다정의 손을 잡았다.


“그런 생각으로 고백 받아준 거였어?”


승태가 미소지으며 묻자 다정이 풋 하고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던 진짜 이유까지도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럼 너는? 진짜 내가 말했던 이유랑 같아?”

“그럼 당연하지.”

“아니 바보야. 그 이유가 다냐구.”

“음…”


승태는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예쁘잖아.”


다정은 만족스러운 듯 승태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벚꽃이 다시 한번 휘날리며 두 사람을 감쌌다. 봄밤의 공기는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완벽한 온도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으며 서로의 온기와 함께 이 순간을 온전히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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