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패딩은 안 입어도 괜찮겠지.”
2월의 마지막 주말, 우수가 지나자 날씨도 제법 풀린 듯했다. 옷장을 열고 옷을 고르던 승태는 드디어 무거운 패딩을 벗어던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코트를 걸쳐 입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빠진 짐이 없는지 체크한 후 집을 나와 용산역으로 향했다.
여행은 항상 설렘과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지만 승태는 신이 나지 않았다.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이미 어느 정도는 극복했다. 어쩌면 서울에 돌아와 다정을 보자마자 괜찮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재밌는 유튜브 영상을 봐도, 일을 열심히 해도 멍한 상태가 계속됐다. 아무래도 인생에서 어딘가 한 부분이 텅 비어버린 그 공허함 때문인 것 같았다.
“일찍 왔네? 우리 기차 시간 얼마나 남았지?”
“왔어? 음… 10분 정도 남았다. 지금 내려가면 되겠는데?”
승태가 용산역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정이 길다란 네이비색 플리츠 원피스에 코트를 걸치고 나타났다. 다정의 진갈색 머리가 늦겨울 아침 햇살에 예쁘게 반짝거렸다. 다정의 표정 또한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은 있었지만 연인이 되고 둘이 가는 첫 여행이니 설레는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설레하는 다정이 부러운 승태였다. 평소였으면 나도 저렇게 설렜을텐데. 아니, 어쩌면 다정이보다 더 신나했을텐데.
“아침 안 먹었지? 내가 토스트 만들어왔어!”
“오 언제 일어나서 준비한 거야?”
“나 진짜 이거 만드려고 새벽에 일어났어. 먹어봐”
승태는 다정이 만든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케찹을 뿌리고 슬라이스 햄과 치즈가 들어간 간단한 토스트였지만 다정이 새벽부터 일어나 이걸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귀여웠다. 무엇보다 그 심플한 토스트는 승태가 최근 먹었던 음식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
“어때? 맛있어?”
“응, 맛있어. 진짜 진심으로.”
“헤헤, 다행이다.”
승태는 고생했다는 의미로 다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은 머리가 떡진다고 말은 했지만 왠지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게 다정과 승태를 태운 기차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다정은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느라 피곤했는지 토스트를 먹고 얼마 뒤에 잠들었다. 승태는 다정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놓고 태블릿으로 영화를 봤다. 다정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이어폰은 한쪽만 꼈다. 그렇게 다정은 중간중간 뒤척이긴 했지만 어쨌든 도착할 때까지 쭉 편안하게 잤다.
기차는 2시간 정도를 달려 전주역에 도착했다. 승태가 다정을 조심스럽게 깨우자 다정이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기차에 내려 전주역 밖으로 나오니 청명한 하늘이 펼쳐졌다. 늦겨울이라 아직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만큼은 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방 안 무거워? 들어줄까?”
“아냐, 괜찮아. 일단 밥부터 먹자!”
승태와 다정은 다정이 미리 알아본 물짜장 집으로 향했다. 전주하면 보통 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다정이 신기한 비주얼에 신기한 맛이라는 후기를 보고 먹어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실제로 물짜장은 이름만 짜장이지 흔히 아는 짜장면의 비주얼이 아니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빨간 울면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이 비유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어찌됐든 뭐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 음식이었지만 맛은 최고였다.
물짜장을 먹고난 후 한옥마을 쪽으로 와 전주난장을 둘러보았다. 부모님 어릴 때나 사용하던 물건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는 일종의 박물관이었는데 그 시절 향수가 묻어나도록 아주 잘 꾸며놨었다. 승태는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괜히 할머니 생각이 났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사진첩에는 승태와 다정의 첫 여행에 대한 추억이 저장되고 있었다.
전주난장을 둘러본 뒤에는 숙소에 짐만 두고 다시 나와 전주덕진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해가 점점 기울며 노을이 지자 덕진공원 전체가 예쁜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예뻤다. 호숫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왠지 이 장소를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풍경이 완벽했다. 승태는 이 순간, 이렇게 예쁜 곳에 다정과 함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해가 거의 다 졌을 때쯤 다시 한옥마을로 돌아와 저녁으로는 떡갈비를 먹었다. 그리고 여행에는 역시 술이 빠질 수 없다며 다정이 자연스럽게 소주를 시켰다. 전주에 왔으니 모주를 먹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승태가 얘기했지만 다정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며 그냥 소주나 먹자고 했다. 떡갈비는 예상했던 것보다 맛있었다. 약간 퍽퍽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맛있었다.
“오늘 우리 진짜 알차게 돌아다녔다.”
“그러게, 뭔가 되게 힐링되는 기분이었어.”
“진짜? 오늘 여행 괜찮았어?”
“응, 진짜 좋았어.”
“근데 왜 한번도 제대로 웃은 적이 없어?”
승태는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분명 즐거웠고 행복했다. 근데 웃은 적이 없다고?
“아냐 나 되게 많이 웃었는데?”
“아니야, 되게 진짜 행복해서 웃는다기 보다는 뭔가 그냥 피식 정도 한 느낌이었어. 그래서 여행이 별로였나 생각했지.”
“아냐, 네가 그렇게 검색도 하고 다 준비해줬는데. 나 진심으로 즐거웠어.”
“그럼 좀더 신난 리액션을 보여봐.”
승태가 거의 짜잔 하듯이 텐션을 올렸지만 다정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정이 그저 걱정 없이 오늘 하루를 즐긴줄 알았는데 자기 눈치를 보고 있었다니 괜히 미안해지는 승태였다.
“아직도 내가 안 신나보여?”
“진짜 하나도 안 신나보여. 내가 여행 준비한 성의가 있지. 계속 그렇게 꽁해 있을 거야?“
“내가 또 언제 그렇게 꽁해 있었다고 그래. 나 진짜로 즐거웠다니까?”
다정의 말투는 점점 걱정에서 짜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승태의 말투 역시 날카로워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 즐거웠는데. 다정은 답답한 듯 한숨을 쉬고는 술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전혀 안 즐거워보였어. 난 네가 나랑 여행 오면 기분도 더 좋아지고 다시 전처럼 신나할줄 알았어.”
“나도 신나고 싶어. 내 딴에는 최대한 신난 거라구. 여기서 어떻게 더 할 수 있는데?”
“내가 네가 신나할 때를 몰라서 이러는 거야? 지금 되게 억지로 신나하고 있잖아.”
“그게 아니라니까. 꼭 그렇게 말해야 해?”
“됐어. 뭔가 다 맘에 안 들어.”
말문이 막힌 승태도 술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생각해보면 실제로 승태가 신나했던 것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하게 나온 것 같긴 했다. 그런데 다정이 그 일로 서운해 할지는 몰랐다.
“다 먹었네. 그냥 들어가자.”
다정은 마지막 술잔을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승태도 얼른 일어나 다정을 뒤따라 나갔다. 그러고는 다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안해. 근데 나 오늘 진짜 행복했어.”
“내가 너랑 안 세월이 얼만데 너 행복한 표정도 모를까봐?”
“아까 난장 갔다온 뒤로 계속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나봐. 마음만큼은 진짜 행복했어.”
승태는 최대한 티를 안내려고 했는데 결국은 티가 났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정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아냐, 내가 미안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닌데 괜히 투정부렸네. 그냥 우리 첫 여행이고 너도 기운을 차렸으면 했는데 내가 기대가 컸나봐.”
“그럴 수 있지. 근데 나 진짜 네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서 너한테 너무 고마워.”
“그랬다면 다행인데…”
“우리 들어가서 한잔 더 할까? 간단한 안주 사가자.”
“휴… 그래.”
다정은 이 상황이 여전히 맘에 안들었다. 그래도 승태가 저렇게까지 얘기를 하니 마지못해 그런가보다 했다. 승태는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만두와 꼬치류를 샀다. 승태는 이 여행이 승태 기운 차리기에서 다정이 기분 풀어주기로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승태가 다정에게 말했던 오늘 하루가 너무 행복했다고 한 말은 진짜 진심이었으니까.
숙소로 돌아온 승태와 다정은 따뜻한 물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술상을 세팅했다. 다행히 숙소에 전자레인지도 있어서 아까 사온 안주를 따뜻하게 데워먹을 수 있었다. 맛있는 안주에 술을 곁들이니 다정의 기분도 다시 나아지는 듯했다. 그렇게 다시 본 승태의 표정도 아까보다 한결 행복해 보였다.
“나는 내가 널 아는 사람 중에 너에 대해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한창 알딸딸해졌을 때쯤 다정이 말했다. 승태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살며시 지었다.
“실제로 그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너만큼 날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근데 아직 잘 모르겠어. 아까는 분명 별로 안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거든.”
“요즘 내가 표정 짓는 몸 속의 어떤 장치가 고장났었나봐.”
“으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구.”
“네가 조마조마해 하면 어떡해. 내가 오늘 누구때매 행복했는데. 오늘 아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게 다 너무 고마워.”
그제야 다정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아까 먹었던 떡갈비보다 안주는 더 소박했지만 술은 확실히 지금이 더 달았다. 다정은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승태가 아닌,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승태는 처음 겪는 것이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다정이 알고 있던 것들과 다른 승태의 모습을 앞으로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얘기를 승태에게 했더니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친구일 때는 몰랐는데 네가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라는 게 새삼 신기해.”
“야, 나 정도면 되게 섬세하지!”
“맞긴 한데 친구일 때 챙김 받는 거랑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당연하지, 내가 네 여자친구니까!”
“아이구, 우리 다정이 아주 이뻐 죽겠네~”
“까불지 마라. 내가 생일 더 빠른 거 알지?”
승태는 여자친구라는 그 단어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였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서 오늘 단 한번도 보인 적 없었던,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술을 다 비우고 승태와 다정은 오늘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했다. 같이 찍은 사진 중 예쁜 사진이 있어 나란히 프로필 사진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우리 곧 100일이네?”
“어린애냐, 그런 걸 챙기게.”
“너 원래 그런 거 다 챙기지 않았었나?“
“그건 어릴 때 얘기지. 승태 너도 그런 거 다 챙겼었어?”
“챙기긴 했었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지낸 세월에 비하면 100일은 너무 작아. 그리고 앞으로 함께 할 시간들에 비해서도.”
“그럼 나 너한테 주려고 선물 가져왔는데 안 줘도 되겠네?”
순간 다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물이라니? 승태는 가방에서 작은 선물 박스를 꺼내 다정에게 건넸다. 다정은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박스 안에는 작은 하트로 장식되어 있는 로즈골드색 팔찌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승태의 작은 메모가 함께 들어 있었다.
『항상 반짝여줘서 고마워』
다정은 놀람과 고마움,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런 다정에게 승태는 팔찌를 채워주고 꼬옥 안아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난 아무 것도 준비 못했는데…”
“이번 여행을 준비해줬잖아. 그동안 진짜 힘들었는데 너무 고마웠어.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구.”
승태가 다정을 더 꽉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은 승태의 품에 한참을 안겨 있다가 승태가 나지막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그 한 마디에 완전히 마음이 녹아내렸다.
“사랑해.”
다음 날 어제보다 더 따뜻해진 늦겨울, 아니 초봄의 햇살이 승태와 다정을 깨웠다. 간밤에 히터 때문에 탁해진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승태가 창문을 열었는데 그와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이 승태의 팔을 타고 침대에서 아직 눈을 비비고 있는 다정에게 닿았다. 올해 들어 가장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산뜻하면서 화창한 초봄의 날씨는 승태와 다정이 한옥마을을 산책하는 동안에도,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서울에 도착한 뒤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다정은 집에 도착해 어제 승태가 채워준 팔찌를 내려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팔찌 끝에 달린 하트 장식이 다정의 무드등에 반사돼 예쁘게 반짝였다. 오늘 꿈에 승태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정은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