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씨, 이한성 독자 클레임 어떻게 됐어?”
“아, 그거 다시 보내드리는 걸로 승인 떨어졌어요.”
“다행이네. 아니 요즘 책 잘못 받았다는 문의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박스에다가 송장을 잘못 붙였다나봐요. 출고팀 신입 실수라던데…”
“걔는 아직 회사 다닌대? 나였으면 고개도 못 들었을 듯.”
“저였어도 진짜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도망갔어요.”
웃으면서 장난치듯 말했지만 다정은 이 상황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신입 한명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거의 운석이 되어 다정의 팀에 떨어졌다. 기껏 편집 잘 하고 제작까지 잘된 책을 출고만 잘 하면 되는데 신입의 실수로 배송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일로 편집팀이 독자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게 어이가 없긴 하지만 변변한 CS팀이 없다 보니 대부분의 문의는 편집팀에서 처리하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보통은 배송 관련 문의보다 책 내용에 대한 문의가 많다 보니 이렇게 진행하고 있던 것인데 이런 사고가 터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 날짜가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바쁜 날들이 지나갔다.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이슬이 맺히기 시작할 때까지 다정은 말 그대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숨돌릴 틈 없이 터지던 사건사고들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나면 독자 문의가 쇄도했다. 제 시간에 퇴근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고 퇴근 후에도 일단 침대에 눕기만 하면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 침대 밖으로 나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책 안 읽는다는 거 진짜 다 거짓말이에요.”
“내 말이.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이렇게 바쁘다는 게 말이나 되냐구.”
“진짜요! 휴…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다정 씨도. 집 가서 푹 쉬어!”
승태와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때를 생각해 보면 훨씬 날씨도 쌀쌀해지고 해도 짧아졌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날씨가 좋거나 쌀쌀한 날에는 따끈한 어묵탕에 소주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다정의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집에서 맥주라도 한 캔 마실까 하다가도 빨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자고 생각할 정도였다.
간간히 승태의 연락은 꾸준히 있었다. 여전히 예쁜 하늘을 보내주거나 퇴근 후에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었다. 다정에게 그런 연락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유일한 숨 쉴 구멍이었다. 지친 하루 끝에 앞만 보고 걷기도 벅찬 다정이 하늘을 한번이라도 올려다 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승태와 마시던 술 한잔을 떠올리며 피로를 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만나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너무 정신 없이 바빴던 탓이 컸다. 이렇게 힘든 상태로 나가봤자 즐겁게 놀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딱히 승태에게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 노는 거라면 즐겁게 놀고 싶었다. 적어도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다.
좀 더 다른 이유를 따져보자면 승태를 보기가 민망했다. 술기운에 그런 말들을 했었던 게 다음날 아침부터 다정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마음이 싱숭생숭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승태에게 구체적인 설명 없이 대뜸 그런 말을 했으니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 그냥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승태의 말마따나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억울함도 어느 정도 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잠시뿐, 이내 그 생각은 마음 한구석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사실상 내가 고백한 거나 다름 없잖아. 다정의 머릿속에 잠시 그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 생각 역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어쩌면 그때 승태가 다정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면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8년을 함께 하는 동안 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승태에게 한번도 설렌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항상 설레다가도 ‘그래도 친구인데’ 하는 생각이 설렘을 몰아냈었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8년 동안 이렇게 친구로 나마 남을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도 찰나의 설렘으로 남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승태가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할 리도 없으니까.
[주말에 단풍 보러 갈래?]
여느 때와 같이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파묻혀 쉬고 있던 다정의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잠금화면에 뜬 승태의 메시지를 슬쩍 본 다정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 시켜두고 화면이 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번 주도 몰아치는 문의 전화와 여러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주말에 축 늘어져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승태와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힘들고, 지치고, 민망함이 다정을 막아섰지만 그런 것들 보다도 더 승태와 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승태의 답장에서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승태가 지금까지의 상황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대충 감이 왔다. 저 한마디에 다정의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승태를 만나야겠다. 만나서 뭐라도 일단 얘기를 해봐야겠다. 그리고 이 마음도 확실히 정리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주는 좀 힘들구 다다음주는 어때? 그때부터는 좀 한가한데.]
[그래!]
물음표와 느낌표의 차이만큼 승태의 답장은 그 온도가 달랐다. 다정은 짧은 대답이었지만 어린 아이처럼 신나 보이는 승태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는 새 흐뭇해 하고 있었다.
여전히 바쁜 날들이 이어졌지만 입동을 지나 주말이 오면 모처럼 놀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버텼다. 승태와의 연락도 한결 가벼워졌다. 일이 하나씩 정리될 때마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지만 뿌듯함과 예쁜 하늘이 다정을 감싸주었다. 그렇게 찾아온 입동,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듯 유난히 추운 그 날에 다시 한번 승태의 연락이 왔다.
[이번 주에 단풍 보러 가기로 한 거 안 까먹었지?]
[당연하지! 내가 지금 그것만 보면서 버티고 있는데.]
[빨리 놀러 가고 싶어…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것도 먹자.]
[좋아!]
“다정 씨, 이거까지만 얼른 정리하자!”
“네!”
승태가 뭔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게 느껴지자 다정의 텐션이 한껏 올랐다. 어떤 일이든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도 생기는 기분이었다. 다정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