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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Sep 22.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7

“이번 주말 이후로 북한산에는 단풍이 절경을 이룰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벌써부터 단풍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회사 점심 시간에 혼자 빠져나와 근처 편의점에서 점심을 가볍게 떼우고 있던 승태는 그 기사를 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하고 생각했다. 입고 있던 옷도 제법 두꺼워졌고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점점 짧아졌지만 가을이 지나가고 있음을 크게 느끼지 못했었다. 승태는 보고 있던 기사를 무표정으로 닫은 후 캘린더를 열어 보았다.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를 지나 마침 오늘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이었다.

다정과의 술자리 이후 몇 주가 지났다. 승태는 그 이후로 다정에게 같이 놀자고 몇 번인가 제안했지만 일이 바쁘다거나, 다른 약속이 있다는 말로 거절당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었으나 거절이 거듭되다 보니 승태의 마음 속에서는 다정이 혹시 자신을 피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승태에게는 다정을 반드시 만나야 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기에 일방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이 상황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다정은 승태가 종종 보내주는 하늘 사진에 예쁘다는 대답만 기계적으로 할 뿐이었다. 적어도 승태가 느끼기엔 그랬다.

승태는 그날의 술주정이 아직 다정의 마음 속에 남아 있나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얘기가 술김에 나왔으니 간밤에 이불킥을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몇 번의 거절이 거듭된 후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년을 함께하면서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다 봐왔지만 이렇게 자신을 피하는 다정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갈 때쯤 승태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아 오전에 하던 업무를 이어서 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았다. 메신저를 켜보았지만 친구들과의 단체방만 시끌벅적할 뿐 다정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메신저를 켜면 늘 채팅방 최상단에 자리잡고 있던 다정이었지만 연락이 계속 이어지지 않다 보니 어느덧 몇 계단이나 아래에 내려가 있었다.


“승태 씨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아니긴 일을 전혀 못하고 있잖아. 이거 내가 엊그제 하라고 줬는데 아직 이거밖에 못했어?”

“주임님이 자꾸 다른 일 시켜서 그런 거잖아요.”

“아휴, 내가 봐줬다. 그래 무슨 일인지 들어볼게.”


김 주임은 승태의 말을 가볍게 넘겨듣고는 괜히 자기가 궁금했는지 승태쪽으로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승태는 약간 짜증났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김 주임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고 곰곰이 들으며 중간중간 리액션을 해주었다.


“까였네, 까였어.”

“네? 제가 뭘 했다고 까여요?”

“그걸 모르니까 까였다는 거야 승태 씨.”

“무슨 말이에요?”

“승태 씨, 그 친구 좋아하는 거 아냐?”

김 주임의 말에 승태가 잠시 할말을 잃었다. 좋아한다는 대답도, 그런 거 아니라는 대답도 얼른 나오지 않았다.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되게 오래 알고 지낸 친구였는데…”

“근데? 한번도 그 친구가 여자로 보인적은 없었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솔직히 저는 그 친구가 그런 의미로 그런 질문을 한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 나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승태 씨 모솔이지?”

“아니거든요! 그냥 일이나 하러 가요 좀!”


승태는 버럭 화를 냈지만 김 주임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승태를 쳐다보더니 묵직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연락해봐.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퇴근길에 승태는 노을이 은은하게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을의 높은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흘러흘러 나무에 걸리기도 하고 노을을 가리기도 하며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노을빛에 잔뜩 물든 구름 사이로 유난히 하얀 구름이 봉긋 솟아있었는데 워낙에 신기한 광경이라 승태는 그 구름을 올려다보다 하마터면 앞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승태는 집에 오는 길에 제육덮밥을 미리 주문해두고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샀다. 집에 들어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타이밍 맞춰 제육덮밥이 도착했다. 딱히 눈길이 가진 않지만 드라마 몰아보기를 틀어놓고 제육덮밥을 비벼 소주를 먹었다.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하는 중에 스마트폰에 몇 번이고 시선이 갔지만 그저 까만 화면만 보일 뿐이었다.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낮에 김 주임이 했던 말 때문에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신경질적으로 밥을 마저 먹고는 싱크대에 대충 던져 두고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 산책로를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단풍이 제법 들어 있었다. 소주 한 병 분량의 알딸딸함이 온몸에 퍼지면서 제법 기분도 괜찮아졌다.


[주말에 단풍 보러 갈래?]


승태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빠르게 다정과의 채팅방을 찾아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 언젠가는 봐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다시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넣고 집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책을 계속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언제 답장이 올지가 신경이 쓰여 더 이상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 미안. 나 이번 주도 좀 바쁜데…]


집에 도착해 보니 다정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알딸딸함과 산책으로 좋아졌던 텐션이 급격히 낮아졌다. 괜한 기대를 했다는 생각이 든 승태는 힘없이 답장 버튼을 눌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여러 번 다정에게 거절을 당하니 마음 한 구석이 시큰거렸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 다정으로부터 빠른 답장이 돌아왔다.


[이번 주는 좀 힘들구, 다다음주는 어때? 그때부터는 좀 한가한데.]


승태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른 ‘그래!’ 하고 답장을 보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아까 산책할 때 단풍 사진이라도 좀 찍어둘걸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이번 주말부터 절정이라던 단풍이 좀 더 무르익어 다다음주에 더 형형색색이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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