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어릿 Sep 21.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6

승태와 다정은 택시에서 내린 후 다정이네 집 골목을 빠져 나와 근처 24시 국밥집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까지도 너무 피곤했던 탓에 그냥 집에 갈까 싶었던 승태였지만 그냥 얼른 해장이나 하고 가자는 생각으로 택시에서 내려 다정의 뒤를 따랐다. 다정은 기분이 좋은 듯 다리를 교차해가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승태가 걸음을 빨리하며 옆에 붙어 걸으려 해도 다정은 그저 신나게 국밥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더 이상 쫓아가기 힘들어진 승태는 그냥 다정의 뒤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따라가며 술기운에 잔뜩 신이 난 다정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돼지국밥 두 개 주세요.”


승태는 대학교 때를 잠시 떠올렸다. 부산에서 올라온 승태는 더 친숙한 돼지국밥을 좋아하는 게 당연했지만 서울 사람이면서도 돼지국밥을 좋아하는 다정이 신기했던 때가 있었다. 언젠가 그 이유를 물어봤는데 다정은 그냥 순대를 별로 안 좋아해서라고 했다. 신기하면서도 은근 음식 취향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가 친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승태는 생각했다.


“저희 소주도 하나 주세요!”

“에? 너 또 먹어?”

“뭐 어때, 내일 출근도 안 하는데.”


다정이 방긋 웃으며 직원이 주는 소주병을 받아 찰랑찰랑 흔들어댔다. 다정은 승태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이미 뚜껑을 따 잔을 가득 채웠다. 다정의 표정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대학교 때 생각난다. 그치?”


소주를 한잔 들이키며 다정이 말했다. 저게 몇 잔째더라 하고 생각하던 승태도 따라서 술을 들이켰다. 진득한 술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내가 진짜 몇 번이나 너 집에 데려다 줬었지.”

“뭐래. 나도 너 여러 번 집에 데려다 줬거든?”

“그래도 내가 데려다 준 만큼은 아닐걸?”

“웃기고 있네. 애들한테 물어봐?”

“물어보던지. 난 안 져.”


어이없다는 듯 다정은 소주를 한잔 더 마셨다. 그러고는 아직 김이 펄펄 올라오는 국밥을 한 숟갈 듬뿍 떠 호호 불더니 입에 넣었다. 대학교 때부터 함께했던 승태와의 술자리, 국밥으로 하는 해장, 쓴 소주.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던 여러 순간에 항상 승태가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 다정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뭔데 항상 함께였던 걸까.


“너 진짜 나 안 좋아해?”


당당한 다정의 물음에 승태는 하마터면 국밥이 코로 넘어갈 뻔했다. 아까 술기운이 잔뜩 올랐던 다정의 장난 섞인 물음이 아니었다. 잔잔하게 온몸으로 퍼지는 술기운과 이 분위기가 꺼내 올린 진심 어린 말투였다. 승태는 국밥을 한숟갈 떠먹고 물을 한모금 마시는 동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다정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술에 취한 와중에도 머리를 최대한 빠르게 굴려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하… 아니다. 그냥 네가 날 좋아한다는 대답이 듣고 싶었나봐.”


승태가 대답을 미처 하기도 전에 다정이 한숨을 푹 쉬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마친 다정은 식탁에 놓여 있는 승태의 잔에 자신의 잔을 살짝 얹듯 부딪히고는 술을 털어 넣었다. 승태는 다정의 말을 듣고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더 고민이 되었다. 테이블에 잔을 내려 놓는 다정의 표정은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승태는 고민 끝에 겨우 생각해낸 말을 꺼내고 나서야 자신의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다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승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승태는 이게 나름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8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주제였는데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등장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냐는 승태의 질문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평소 술에 취해도 텐션이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이런 식으로 취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싶었다. 워낙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아끼던 다정이라 술을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털어 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방향으로 흐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다기 보다는… 요즘 들어 네가 부쩍 친절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에이,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 안 지가 벌써 8년이야.”

“8년을 함께 했다고 꼭 친절할 이유는 없잖아. 요즘 너랑 약속이 생겨서 만난다고 하면 괜히 내 기분이 이상해.”


다정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사뭇 진지해졌다. 승태는 소주병을 들어 괜히 국밥 그릇을 휘젓고 있는 다정의 소주잔을 채워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너한테 친절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


다정은 승태가 채워주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주병에서 마지막 방울이 입구에서 다정의 잔 안으로 뛰어들었다.


“적어도 난 좋아. 너의 이런 친절이.”


마지막 잔을 마시고 둘은 일어나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한층 차가워진 공기를 지나쳐 다정의 집으로 향했다. 다정의 발걸음은 아까보다는 다소 무거워 보였지만 여전히 승태는 다정의 두세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나 들어 간다! 집 들어가면 연락하구.”

“그래, 잘자구.”


승태는 다정의 집 근처 사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다정의 말을 곱씹어봤다. 술기운에 들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은 우선 가슴 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 옷을 대충 벗어 던져둔 뒤 술에 찌든 몸을 침대로 내던졌다. 그러나 여전히 다정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이전 06화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