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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Sep 15.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5

승태와 다정이 향한 곳은 당산역 근처에 위치한 이자카야였다. 은은하면서도 어둑한 조명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구석 자리에 마주 앉은 둘은 모둠 어묵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아까 맥주를 마신 탓에 그다지 소주를 먹고 싶지 않은 다정이었지만 승태의 거침 없는 주문에 그냥 있는 대로 먹기로 했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승태는 딱히 다정이 궁금해 하지 않는 말들만 잔뜩 늘어놨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던지, 예전에는 걷는 걸 좋아했는데 요즘은 왜 그렇게 걷는 게 귀찮은지 모르겠다던지 하는 얘기들이 다정의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하나 확실했던 건 아까는 초점이 없어보이는 듯했던 승태의 표정이 한결 나아보인다는 것이었다. 다정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키가 훤칠한 아르바이트생이 모둠 어묵과 소주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정은 무의식 중에 그 남자에게 시선을 잠시 빼앗겼다가 다른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앞에 있던 승태에게 다시 시선을 돌려놓았다. 승태는 자연스럽게 소주병을 흔들고 뚜껑을 따 잔을 채웠다. 승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수에 어묵을 몇 개 담그더니 잔을 들어 다정의 소주잔과 부딪혔다.

술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승태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계속되었다. 최근 들어 예전에 다시 봤던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하고 있는데 봤던 걸 또 보다 보면 처음 봤을 때는 못 보고 지나쳤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와서 재밌다고 했다. 다정도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며 맞장구쳤지만 승태는 그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라며 툴툴거리다가도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관계에 잔뜩 몰입해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며 드라마 안으로 들어갈 기세를 보이기도 했다. 다정도 이에 점점 동화되어 처음 이자카야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승태의 태도에 대한 의아함은 점점 줄어들고 술기운은 점점 올라왔다.

승태와 다정의 술자리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굳이 다른 사람을 끼지 않아도 둘만 있어도 늘 즐거웠다.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서로에게 몰입해서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놀리기도 하고 걱정도 하며 술을 마시다보니 어느새 네 병째 병을 비우고 있었다. 물론 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네 병째를 막 다 마셨을 때쯤 승태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 가게 밖에 화장실이 있던 탓에 빽빽하게 들어 앉은 사람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저녁 가을 바람이 옷 안으로 파고들었는데 제법 쌀쌀함이 느껴졌다. 취기도 약간 오르는 듯 눈 앞 풍경의 윤곽이 살짝 흐려졌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다정의 자세가 바뀌어 있었다. 한쪽 팔을 식탁에 올리고 턱을 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힘겨워 보였다.


“벌써 취했냐?”

“안 취했어! 여기 소주 한 병만 더 주세요!”


승태도 취기가 제법 올랐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내일은 어차피 일요일이니까 숙취가 조금 있더라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여유를 부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둘 다 숙취가 심한 편이면서도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승태였다. 그만큼 같이 노는 게 재밌으니까.


“나 궁금한 거 있는데에.”


새로 나온 다섯 병째 소주의 뚜껑을 따서 자기 잔을 먼저 채우더니 다정이 물었다. 말끝을 흐리기 시작한 걸 보니 진짜 취한 모양이다. 승태는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듯 술병을 받아 들어 자기 잔에 채우고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뭔데?”

“너 혹시 나 좋아해?”


또 이 질문인가. 승태는 익숙하다는 듯 잔을 부딪히고 소주를 털어 넣고 기본 안주로 나오는 과자를 입에 털어 넣었다.


“왜 그러는데 또.”

“아니이, 왜 그러는 게 아니라아. 후… 또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려구.”


다정은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탁 소리를 내며 식탁에 내려놓았다. 승태의 표정은 그러는 동안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정의 그릇에 국물과 어묵을 리필해줄 뿐이었다.


“이거 봐. 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거 왜 해주는데에.”

“너랑 나랑 세월이 몇 년인데 이런 걸로 난리야.”


다정은 안 취한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승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다정에게 승태는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년부터였나. 술만 마시면 다정은 승태에게 자기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왔다. 무슨 소리냐고 아니라고 해도 다음 날이면 까맣게 잊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고백을 하지는 않았다. 승태가 보기엔 그저 다정이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승태도 그런 다정의 모습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다정을 보고 그냥 술버릇이구나 하고 넘겼다.


“그럼 이게 뭔데에.”

“뭐긴 뭐야. 친구니까 그냥 챙겨주는 거지.”

“쓰레기 새끼…”


다정이 아무래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집갈 때 힘들겠네.


“취했다. 집에 가자.”

“아직 안 취했어어!”


다정의 말과 달리 다섯 병째 소주는 이전과 달리 현저히 느린 속도로 줄어들었다. 안주로 손이 가는 속도와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럴수록 다정의 몸은 점점 식탁과 가까워졌다. 물론 승태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둘의 주량이 비슷한 탓에 승태도 점점 자신이 술이 되어감이 느껴졌다. 이것만 먹고 일어나야지. 그렇게 생각했던 찰나였다.


“너는 분명 나 좋아해!”


갑자기 다정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승태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뱉듯 말했다. 그 덕에 승태도 잠깐 놀랐지만 올라오는 술기운에 몸을 맡기자 다시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가 보다. 야 이것만 먹고 이제 가자.”

마지막 잔을 따르는 승태를 다정은 한껏 노려봤다. 승태의 심드렁한 태도가 퍽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태는 어차피 내일이 되면 기억도 못하겠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마지막 잔을 마셨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도 택시를 기다리는 듯 길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잔뜩 취한 둘이었지만 익숙하게 큰길로 나와 택시를 부르고 있었다. 다정이네 집으로 향하는 택시는 금방 잡혔고, 승태는 다정을 집에 데려다주고 자기는 그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다정은 그저 말없이 끄덕였다.

택시를 타고 다정이네 집으로 향하고 있으니 승태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정이 쪽으로 고개를 슥 돌려보니 다정은 그저 택시 기사님의 뒤통수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저렇게만 있으면 그냥 멀쩡한 사람 같아 보인다고 승태는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한강 왜 오자고 했어?”


약간은 술이 깬 듯한 목소리로 다정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승태가 다정을 돌아보았지만 목소리만 그랬을 뿐 다정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술이 덜 깼다는 증거였다. 어떻게든 술을 깨려는 일종의 술버릇이었다. 다정을 향해있던 시선을 거두고 잠시 망설이던 승태가 나지막히 대답했다.


“한강을 가고 싶은데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너라서.”


그 대답을 듣고 다정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다정은 창문에 머리를 살짝 기댔고 택시는 그저 다정이네 집을 향해 하염없이 달렸다. 택시가 다정이네 집 골목에 들어왔을 때쯤 다정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해장하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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