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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Sep 08.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3

다정은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을 했지만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제 승태와 보냈던 맥주집에서의 시간은 만나기 전부터 묘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소주도 아니고 겨우 맥주 몇 잔에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어쩌면 그 긴장감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니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랑 놀면 재미있냐니.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사실 애초에 왜 그렇게 긴장을 했는지,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승태를 만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는데 결과가 그거라니. 그냥 머리를 쥐어 뜯고 싶었다.


“다정 씨, 이 부분만 좀 수정해줘요.”

“네? 아… 네.”


임 대리가 서류 파일을 가져오더니 수정할 부분을 짚어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다정은 멍하니 수정 사항을 바라보다가 곧 어제의 기억을 잠시 미뤄두고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백스페이스로 기존에 써뒀던 문장들을 지웠다. 어제의 그 말도 안되는 ‘나랑 놀면 재밌어?’라는 그 질문도 백스페이스로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숨을 푹 쉬고 삭제한 부분에 다시 내용을 채워 넣었다.

점심 시간에 밥을 먹으면서도 어제 먹었던 버터구이 오징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승태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대체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데? 두 사람이 알게 된 지 벌써 8년이 넘었다. 대학교 때 처음 만나 승태가 군대 가는 것도 놀려주고 전역하는 것도 축하해줬다. 다정의 졸업식 때 당연히 승태가 와 주었고, 승태의 졸업식 때 다정 또한 그랬다. 주변 친구들은 1학년 때만 해도 둘이 무슨 사이냐며 놀려댔지만 별 사건 없이 둘이 함께 어울려 다니니 2학년 때부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 왔고, 적어도 다정은 승태와 친구 이상의 무언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설마 내가 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잔반을 버리고 구내 식당을 빠져 나오면서 그 생각도 함께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진짜 그런 감정인 생긴 걸까? 예쁜 가을 사진 하나 보내줬다는 이유로? 아니면 술 먹자고 했는데 곧바로 온다고 해서? 그런 것들은 함께 했던 8년 동안 무수히 많았던 일들이다. 이제 와서 겨우 그런 것들에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의문을 품은 채 다정은 집에 와 치킨 반 마리를 시켜 맥주를 마셨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도 없고 정주행 중인 드라마도 없어서 유튜브를 켜 놓고 맥주와 치킨만 먹었다. 새로 올라온 영상에는 흥미가 안 생기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틀어 놓지 않고 조용히 술만 마시기에는 너무 적적할 것 같아 전에도 봤던 영상을 억지로 틀어두었다. 맥주 한 캔을 다 마셨을 때쯤에는 치킨도 딱 맞게 떨어졌다.

맥주를 마시면서 다정은 나름대로 자신이 이상한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계절도 바뀌었고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다. 흔히들 가을 탄다고 하지 않은가. 그냥 단순히 가을을 타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기분도 며칠 지나면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갈 것이다. 매년 그래왔으니까.


“띵동”


그 순간 다정의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화면에는 박승태로부터 온 메시지라는 문구가 떠있었다. 알림은 마치 재촉하는 듯한 말투로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하세요.’라고 떠 있었다. 잠금 화면에서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 기능은 생각보다 쓸만한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메시지일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확인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주말에 한강 놀러 갈래?]


승태의 메시지였다. 이게 뭐지? 갑자기 한강? 승태는 평소에 걷는 걸 좋아했다. 다정도 걷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사귀었던 남자들과 일부러 산책을 하는 데이트를 즐겨하지는 않았다. 잠깐, 데이트라니? 이런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 승태가 남자친구도 아닌데. 가야 하나? 짧은 시간 동안 다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생각을 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몇시쯤 갈 건데?]

[한 4시쯤?]

[가서 뭐하게?]

[뭐 딱히 할 건 없는데… 가서 라면이나 먹고 올까?]


이유도 시덥지 않고 시간도 참 애매했다. 점심 때도 아니고 저녁 때도 아닌 4시라니. 그것도 그냥 라면 먹으러 굳이 한강까지 가자고? ‘참 너답다’ 하고 답장을 하려고 하다가 참았다. 다시금 다정의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뭘 입고 갈지, 가서 뭘 해야 재밌을지 고민했다. 이번 주말은 이 이상한 기분이 뭔지 확인할 수 있을까? 그렇게 승태에게는 먼저 잔다며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유튜브에 집중했다. 여전히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주말의 한강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선선한 날씨를 따라 사람들도 가을 나들이를 온 듯했다.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여유롭게 햇빛을 만끽하는 무리도 있었고,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 마지막 여름의 모습을 담아두려는 듯 카메라를 거치해두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아저씨들도 몇몇 보였다. 이 근처에 사는 듯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역시나 커플이 정말 많았다.

이제 막 가을에 들어섰지만 한강 물은 한여름에 비하면 훨씬 차가워 보였다. 강바람을 맞고 서 있으니 곧 승태가 다정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승태를 보자마자 다정의 얼굴엔 다시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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