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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Sep 14.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4

“일찍 왔네?”


승태는 다정을 발견하고는 다가오면서 능청스럽게 인사했다. 마치 한강이 자기 집앞이라도 되는 듯 후드집업에 와이드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승태의 모습은 이 동네 주민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저기 산책 나온 아주머니랑 뭐가 다르냐고 저게.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찰랑거리는 원피스를 차려입은 다정의 기대가 한풀 꺾였다. 그래 내가 쟤한테 뭘 기대하겠어. 원래 저런 놈이었지.


“넌 니가 불러 놓고 왜 이렇게 늦어!”

“미안미안, 대신 라면은 내가 살게.”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승태는 그대로 돌아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다정은 어이없다는 듯 승태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승태의 뒷모습은 신나보였다. 묘하게 양발이 교차하듯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와 리듬을 타는 듯한 고갯짓과 어깨가 그 신난 기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 오늘 되게 기분 좋아보인다’ 하는 그런 걸음이었다.

바람이 살랑하고 불어왔다. 다정의 원피스를 살랑 흔들고 손목에 뿌려둔 향수를 살짝 훔쳐갔다. 머리카락도 살짝 들썩이며 어깨 뒤로 넘어갔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그때 살짝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이 몇 다발 걸려있었다. 다정과 승태가 지나친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은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청명한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편의점에 도착한 승태는 라면 앞에서 고민을 했다. 한강에서 먹는 라면은 그래도 국물이 있는 게 근본이면서도 오늘은 이상하게 짜장라면이 먹고 싶었다. 수많은 라면 종류 속에서 고민의 강을 헤엄치던 승태에게 다정이 다가왔다.


“뭐 먹게?”

“고민 중이야. 짜장라면 먹을까, 아님 그냥 국물 있는 거 먹을까?”

“뭘 고민해. 너 짜장라면 먹어 내가 국물있는 거 저거 먹을게. 매운 거.”


다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짜장라면 하나와 국물라면 하나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빨리 와서 계산이나 하라는 듯 눈짓을 보내는 다정이 승태의 눈에 들어왔다.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승태는 자연스럽게 맥주 두 캔을 냉장고에서 꺼내 카운터로 향한 뒤 계산을 했다.

그 뒤로 막힘 없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라면은 먹음직스럽게 익었고 그 냄새는 환상적이었다. 라면을 들고 밖으로 나와 벤치에 다시 자리를 잡았을 때쯤에는 해가 저 멀리 보이는 양화대교를 넘어가며 노을을 그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그 바람은 승태와 다정의 라면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을 한 움큼 훔쳐갔다.

둘은 맥주캔을 따서 톡 하고 캔을 부딪히고 한 모금씩 들이마셨다. 맛있게 잘 익은 라면을 한입 먹으니 탄산을 씻어내며 온몸에 따뜻함을 퍼트렸다.


“근데 왜 우리 굳이 한강까지 와서 라면을 먹어?”

“왜? 별로야?”

“아니 별로라는 게 아니라. 진짜 갑자기 뜬금 없이 한강에 오자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 라면을 먹자고 하지를 않나.”

“좋잖아. 해 지는 것도 보기 좋고 라면도 맛있고 맥주도 맛있고.”

“그니까. 다 좋은데 너무 뜬금 없는 거 아니냐구.”


승태는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지막 한 입인듯 탈탈 털어놓고는 맥주캔을 살짝 구기고는 다 먹은 라면 그릇 안에 맥주캔을 살며시 내려놨다. 그 모습을 보고 다정도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는 똑같이 캔을 구겨 라면 그릇 안에 넣었다. 해가 거의 져 하늘에는 노을의 여운만이 남았다.


“한잔 더 마시러 갈래?”


비스듬히 기대있던 승태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다정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어딘가 초점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아까 라면을 사러 갈 때의 신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정은 그저 궁금했다. 저 애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그러자.”


승태와 다정은 각자 라면 그릇을 들고 근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를 한 뒤 말없이 여의도 방향으로 걸었다. 바람이 다시 살랑 불어왔다. 전철을 타고 당산역에 내렸을 땐 이미 해가 다 지고 가로등이 켜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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