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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Sep 07.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2

집에 도착해 저녁으로 라면이나 먹을까 생각하던 승태는 술 한잔 하자는 다정의 연락을 받고 냄비에 받고 있던 물을 그대로 싱크대에 쏟아버린 후 옷을 갈아 입었다. 집에 와 무방비 상태로 있던 머리를 다시 다듬어주고 하루 종일 일하느라 날아간 향수를 다시 손목에 뿌려 주었다.

어느새 해가 진 거리의 네온사인들은 노을빛 대신에 거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밤에만 볼 수 있는 이런 풍경도 제법 몽환적인 느낌이 난다고 승태는 생각했다. 벌써 1차에서 한잔 했는지 사람들의 표정도 약간 상기된 듯했다. 그 사람들의 기운을 받은 덕인지 약간 기분이 좋아진 승태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맥주집에 사람은 많았지만 다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한 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를 하고, 긴팔을 챙겨 입고 앉아 있는 다정을 발견한 승태는 곧바로 그 앞으로 가 앉았다. 맥주는 방금 막 나온 듯 아직 거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안주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오, 박승태 딱 맞춰 왔네? 맥주 방금 나왔어.”

“그래? 내가 타이밍 기가 막히게 맞췄네. 근데 박승태가 뭐냐? 정 없게.“

“어휴 알았어. 짠이나 할까 승.태.야?“


다정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잔을 들어보였다. 승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정을 한번 슥 보고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혔다. 톡 쏘는 맥주의 탄산이 혀를 스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버터구이 오징어를 이쑤시개로 꼭 찍어 아무런 소스도 찍지 않고 곧바로 입에 넣었다. 쫄깃한 오징어 사이로 씹을 때마다 버터의 고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메신저로도 했던 얘기를 만나서 다시 할 뿐이었지만 마주보고 앉아 승태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통해 직접 얘기를 듣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특별히 바쁜 날이 아니더라도 퇴근 후에 승태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다정에게 있어 삶의 피로를 씻겨 내려주는 몇 안되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승태에게도 이 시간은 소중했다. 주변에 다른 친구들도 있지만 다정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는 무언가 달랐다. 다른 친구들이었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사소한 얘기들도 다정에게는 서스럼 없이 꺼내게 된다.

맥주를 두어 잔 정도 마셨을 때쯤이었다. 취했다기 보다는 알코올이 몸에 돌면서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고 느낄 때쯤, 다정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맥주집에서도 소주를 먹고 있었을 다정이었지만 오늘은 승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맥주를 시켜두었다. 소주도 평소라면 2병 정도는 거뜬히 먹었을 다정이었는데 오늘은 맥주 두 잔에 벌써 얼굴이 빨갛다. 무슨 일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별일 없었는데?”


다정은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지으며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비스듬하게 승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약간이지만 다정의 몸이 승태쪽으로 기울었다.


“아니 오늘은 소주 안 먹고 맥주 먹는 것도 그렇고, 오늘따라 취해 보이길래…”

“취한 거 아니거든! 그리고 오늘은 그냥 맥주가 먹고 싶었던 것뿐이야.”


다정은 어이없다는 듯 맥주를 털어 넣고는 오징어를 마요네즈에 푹 찍어 먹었다. 승태는 그런 다정의 표정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본 다정은 묘하게 짜증이 났지만 마냥 기분 나쁜 짜증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승태는 맥주 몇 잔으로 벌써 취했냐는 둥, 소주 마셨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둥 다정을 놀려댔다.

맥주로 배를 가득 채웠을 때쯤에는 이미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다정은 승태에게 절대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길에 비틀거리지 않도록 잔뜩 신경을 쓰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다정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니 마치 가을이 왔다는 것을 다시 상기 시켜주듯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너는 나랑 놀면 재밌어?”

“응? 갑자기?”


뒷짐을 지고 바닥을 지긋이 바라보며 집으로 향하던 다정이 별안간 승태에게 물었다. 승태는 뜻밖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잠시 걸음을 멈출 뻔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정과 걸음을 맞춰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다정은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궁금해서. 그래서 나랑 놀면 재밌냐구.”

“재밌지 그럼. 너는 어떤데?”

“나? 글쎄다?”

“글쎄다? 너 나랑 노는 거 재미 없어?”


승태의 시선이 다정에게 날아가 닿았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노는 게 재밌다는 승태의 대답에 어느새 다정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글쎄라고 대답한 다정의 대답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자신과 노는 게 재미 없냐고 되묻는 승태의 목소리에는 어이없음과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있는 듯했다.


“아냐, 나도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확실히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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