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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Sep 01.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1

다정은 출근 준비를 하며 이제는 긴팔을 챙겨야 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계절이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침에 눈을 떠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을 확인하는 것이 퍽 자연스러워졌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서 아침 저녁으로 살갗을 스치는 찬 기운은 자칫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기 딱 좋았다. 오늘 아침 기온은 그 정도로 낮진 않았지만 다정은 긴팔 셔츠를 챙기며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는 어떻게 대비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을 나서자마자 찬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다정은 얼른 긴팔 셔츠를 가방에서 꺼내 걸쳐 입었다. 올해 만큼은 꼭 감기에 걸리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하지만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에 걸리다 보니 다정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짜증을 부리고 한숨을 내쉰다. 어쩌다 감기에 몸살까지 함께 찾아오면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입맛도 없어져서 누가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잘 먹지도 않는다. 그나마 본가에 있을 때는 챙겨주며 잔소리하는 엄마라도 있었지만 자취를 시작한 지금은 스스로를 챙기지 않으면 챙겨주는 사람도 없다.

다정의 일상은 매우 권태로웠다. 매일 똑같은 일, 늘 먹던 메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특별한 사건사고도 없고 작업량이 크게 늘지도 않았다. 회사 사람들도 다정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는다. 다들 자기 할일 하기에 바빴고 하루에 한번 다정을 부를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평소 손이 빠르진 않지만 일머리가 있었던 덕에 오늘 할 분량을 빨리 끝내고 다정은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도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놓인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을 뿐 다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퇴근 시간 5분 전부터 탈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 화면에 ’사진을 보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얼른 화면을 켜 확인해보니 승태가 보낸 구름이 걷힌 하늘 사진이었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오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그쳤는데 해가 질 무렵이 되니 보라색과 핑크색 사이의 오묘한 색과 노을의 주황빛이 절묘하게 구름에 걸리며 장관을 이뤄내고 있었다. 다정이 가장 좋아하는 하늘이었다.

그러고보면 승태는 다정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권태로울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 식으로 예쁜 사진을 보내온다거나 약속을 잡는다. 매일 장난만 칠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참 신기하면서도 배려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힘든 일이 있으면 승태에게 의지했다. 평소 남들에게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 다정이었지만 승태에게는 왠지 속에 있는 걸 털어놓으면 괜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정과 승태는 서로 연락하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별것 아닌 얘기로도 오랫동안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고, 음식 취향도 크게 다르지 않아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만 해도 즐거웠다. 어느새 다정에게 있어 승태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회사를 탈출해 하늘을 올려다 봤는데 이미 해가 져서 제법 어두웠다. 승태보다 다정의 퇴근 시간이 늦기에 당연했지만 승태가 보내준 사진 속 풍경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발걸음을 옮겨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다정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대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이고, 마침 오늘 아침 비가 그쳤으며, 마침 오늘 승태가 예쁜 하늘 사진을 보내왔다. 지하철역 근처를 서성거리며 승태에게 술이나 한잔 할까 하고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망설였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도 하지 않고 물어봤을 텐데 오늘따라 왠지 마음이 이상했다.


‘그래, 그냥 평소처럼 물어보면 돼. 자연스럽잖아?’


다정은 마치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승태에게 오늘 맥주나 한잔 하지 않겠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언제 답장이 오려나 하고 있던 찰나, 승태로부터 빠르게 답장이 왔다.


[그럴까? 어디서 볼래?]


다정은 그 답장을 보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정의 집 근처에 둘이 자주 가던 맥주집으로 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다정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역 안은 늘 그렇듯 사람이 많았고 지하철을 타서도 발 디들 틈 없이 비좁았지만 다정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예쁜 금요일 저녁을 집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안주는 우리가 늘 먹던 버터구이 오징어면 되겠지? 승태 배고프려나…’


다정은 승태보다 먼저 맥주집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버터구이 오징어와 감자튀김을 시키고 승태가 오기 전에 얼른 화장을 고쳤다. 오늘따라 속눈썹이 괜히 더 잘된 것 같았다. 손거을로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고는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곧이어 주문했던 버터구이 오징어와 감자튀김, 맥주 두 잔이 나왔고 잠시 뒤 승태가 들어와 두리번거리더니 금세 다정을 찾고는 앞에 와 앉았다. 하얀 면티에 하늘색 얇은 셔츠를 걸치고 온 승태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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