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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Aug 31.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0

올해의 처서는 8월 22일이었다. 8월 초의 입춘은 그 의미와 달리 가을의 초입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더운 날씨였으나, 처서가 되면서 진짜 여름의 더위는 물러가고 가을의 선선함이 찾아왔다. 아침 공기는 적당히 서늘하고 저녁에도 창문만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새로운 계절이 온 것이다.

승태는 이런 가을 날씨를 가장 좋아했다. 더위를 많이 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름을 싫어하게 된 것도 있지만 그가 가을을 좋아하게 된 데는 예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여름의 경우 비도 많이 오고 날씨가 대체로 습하다 보니 아예 구름 한점 없이 맑거나 잔뜩 구름이 낀 날이 많아 하늘이 예쁘다는 느낌이 덜하다. 그에 비해 가을이 되면 구름들이 뭉게뭉게 떠다니기 시작해서 저녁 즈음에는 구름에 걸린 노을빛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저녁 때가 아니더라도 대낮에 유유히 흐르는 구름들을 보고 있으면 가을 바람을 타고 나른한 평화가 찾아오곤 했다.

그날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저녁 찬거리를 사고 오르막을 오르며 봤던 하늘이 딱 그랬다. 해가 구름 밑으로, 산 뒤로 넘어가면서 구름에게 후광을 만들어주고 점점 붉어지는 그 빛이 승태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찬거리가 든 봉투를 오른손에 꽉 쥔 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가장 최적의 각도를 찾아 사진을 찍었다. 처음 찍은 사진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자리에서 몇 장을 더 찍었다.


[오늘 하늘 진짜 이쁘다!]


승태는 찍었던 사진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메신저에서 채팅창 상단에 고정되어 있는 한다정에게 그 사진을 보내고는 다시 집으로 가는 오르막을 올랐다. 함께했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승태는 다정에게 꾸준히 이런 예쁜 순간을 공유해왔다. 주변 친구들은 이런 승태의 모습을 보고 다정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추궁해 왔었다. 그러나 승태는 그런 거 아니라며 부정했고, 다정 역시 그냥 친한 친구라고 답변하며 사귀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친구들의 의심 섞인 관심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친구들의 반응이야 어찌됐든 승태와 다정이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세상 천지에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오고 매일 시덥잖은 이야기로 연락을 주고 받아도 질리지 않는 사람. 이렇게 예쁜 하늘을 볼 때면 같이 한강에서 산책을 하거나 공원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교수님들이나 같은 과 사람들 뒷담화를 하던 대학생에서 어느새 회사 사람들 뒷담화를 하고 사회에 불만 많은 평범한 청년이 될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연애보다는 조금 멀고 친구보다는 조금 가까운 그런 사이로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했다.


[그러네! 역시 네가 보내주는 하늘 사진이 좋아.]


집에 돌아온 승태에게 온 다정의 답장은 아까 봤던 예쁜 하늘에 더해 승태를 더욱 기분좋게 했다.

가을 장마가 찾아와 비가 심하게 내리던 날이 있었다. 여름의 어느 날처럼 하늘은 어둡고 우산에 가려 하늘을 올려다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바람은 또 어찌나 부는지 우산을 써도 바짓가랑이가 다 젖을 만큼 세차게 비가 내렸었다.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승태는 문득 비 오는 날을 싫어하던 다정이 생각이 났다. 요 며칠 회사 때문에 잔뜩 우울해 하던 다정이었기에 승태는 집에 오는 길에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밖에 비 엄청 와. 오늘 집에 있었어?]

[응. 기분도 안 좋은데 비까지 오니까 진짜 최악이야.]


평소 사람들에게 자기 기분을 티내지 않는 다정이었기에 승태는 이런 그녀의 감정 표현은 승태에게 은근 뿌듯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승태에게 있어 다정은 더욱 소중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지만 나에게는 어떤 모습이든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 다정이라서 더 좋다고 생각하는 승태였다. 다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줄 자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승태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다정이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지를.

비가 그친 다음 마주한 하늘은 평소보다 훨씬 예뻤다. 비를 머금던 구름이 흩어져 흘러가면서 나무와 건물에 걸리다가 햇빛을 받으면 그동안 너무 어둡고 흐려서 올려다보지 못했던 만큼 하늘은 우리에게 찬란한 위로를 건넸다. 비오는 날을 견디느라 고생했다고. 무더운 여름을 잘 견뎌냈다고.

그래서 승태는 다정에게 다시 예쁜 하늘을 선물로 줬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라는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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