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던 GR65

만 65세 할머니의 몸부림친 여행기 11

by 꿈돌

< 순례자의 마음가짐 >

6/15 토요일

새벽5시, 눈을 떴다. 아무래도 아침 형 인간이 될 것 같다. 언니야는 발도 빠르지만 손과 몸도 빠르기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빨리 빨리 준비해야한다. 다 못쓴 일기를 부랴부랴 쓰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은 바게트와 잼 그리고 버터, 어제 먹고 남은 치즈와 햄, 여러 가지 과일 쥬스들과 커피나 티를 주었다. 재미있게도 프랑스는 커피나 티를 커다란 사발에 준다. 커다란 사발에 주는 따뜻한 티는 몸의 근육들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것 같다. 게다가 갓구운 프랑스의 바게트는 정말 맛있다. 아침 빵을 양껏 먹고, 엊저녁에 주문한 도시락도 챙겼다. 쏘그를 출발하며 르 삘르헤(?)(Le Villerret d’Apchier) 까지 15km를 걷는 게 오늘의 일정이다.

희고 빨간 가로줄 두 줄만 있으면 마음 놓고 길을 걸었다.

우리가 묵었던 깨끗하고 아담한 쏘그의 숙소, 이곳의 여주인은 레이스를 만드는 사람이란다. 그래선지 크리덴샬의 스티커도 레이스 모양으로 된 것을 붙여주었다. 숙소를 나오며, 주인장에게 물을 좀 담아갈 수 있겠냐며 패트 병을 주었더니, 수돗물을 받아주며 그냥 먹어도 된단다. 집 주위를 가리키며 보시다시피 산이 깊어 물이 깨끗하단다. 엊저녁에 마신 물도 그 물이라는 것이다. 이 근방의 물은 다 그냥 마셔도 되지만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선 절대로 안 된다고. '아, 그렇구나.' 물갈이를 하면 늘 배탈이 나는데 , 정말 그 물을 먹고도 배탈이 안 났네.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지방에 가서 물을 마시면 배탈이 잘 나, 늘 물을 사먹는데 말이다.

사실 배탈이 잘 나는 것은 나의 오랜 지병이다. 장염을 앓기도 했지만, 개복 수술을 하고 나서부터는 홍합이나 표고버섯을 먹어도 배가 아파 절대로 안 먹는다. 너무 매워도, 너무 차가와도(아이스크림도 안 먹는다), 너무 기름져도, 하여간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금물이다. 그러니 물도 다 사먹을 작정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난 후로는 아무데서나 물을 받아먹게 되었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자유로운지. 우리가 다니는 마을은 대개가 시골이라 식료품점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이 깨끗하고, 아무 데서나 받아마셔도 내 몸이 받아들여준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고 기적일 수 밖에.

왼쪽 저 멀리 보이는 오두막(?)이 고마운 화장실이다.

기적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 길을 떠나기 전부터 나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용변을 어떻게 보냐는 거였다. 소변이야 우리가 걷는 길이 거의 숲길이니 아무데서나 들어가서 볼일을 본다고 하지만 대변은? 나는 그게 정말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배탈이 잘나는 내가 설사라도 하는 날이면 어찌한단 말인가? 오 마이 갓! 리얼리 갓!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을 가면 어김 없이 큰 거 작은 거 용변을 잘 보고 하루를 시작했다.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돌아오는 날까지 그럴 수 있었으니, 이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아, 어느 하루 중간에 배가 아픈 날이 딱 하루 있었는데, 그날 걸은 길엔 가는 곳곳마다 화장실이 있어 사방에 벽이 있는 곳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정말 그 감사를 어찌 설명하랴. 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소나무 숲길도 지나고, 목장 길도 지나고, 화강암으로 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간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는 바(Bar)를 운영하면서 수제 치즈와 요쿠르트를 파는 농가가 있단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몇 채 안되는 집인지라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벌써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그 집 마당의 벤치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슬슬 마당을 돌다가 빈자리가 생겨 얼른 가 앉았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로 만든 벤치라도 식탁이 갖춰져 있는 앉을 자리가 너무 반갑다. 요쿠르트를 주문하고, 도시락을 펴보니 언니야 도시락에는 빵과 햄, 내 도시락에는 빵과 삶은 달걀만 세 개나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도시락을 주문할 때 햄과 치즈, 달걀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길래, 햄과 치즈는 어제 많이 먹어서 달걀을 골랐더니, 정말 아무 것도 없이 빵과 달걀만 들어 있다. 참말로...... 다행히 요쿠르트가 있고, 방울 토마토가 있고, 쥬스도 있어 순례자의 점심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언니야와 함게하면 어디서나 가게를 찾아 먹을 것을 준비하기에 먹을 것도 걱정할 일이 없다. 물과 먹을 것과 신진대사를 걱정할 일이 없으니 진실로 복된 순례자임에 틀림없다.

다시 목장 길이 펼쳐진다. 해발 1100m가 넘는 푸른 목초지에서 마음대로 다니며 풀을 뜯고, 앉아있는 소들이 참 행복해 보인다. 길 위에는 여기저기 소똥이 퍼져있다. 우리가 다니는 길도 거의 다 소들이 다니며 만든 길이라니 소똥이 있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걸어가다가 만난 한 마을에서 휴식하며 사과를 먹고 있는데 바로 내 앞을 소들이 지나가면서 응가를 엄청시리 쏟아내며 지나갔다. "뿌지직 철 퍽!" 예전같으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라 담벼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넌 너의 일을 하고, 난 나의 일을 한다. 그저 태연하게 쳐다보며 베어 무는 사과가 어찌 맛있던지, 미소를 머금었다.

처마 밑에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 놓아서 좋았다.

날이 흐려지더니 갑자기 부슬 부슬 비가 온다. 비가 오니 춥다. 우린 다행히 일찍 숙소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숙소 앞 처마 밑에 앉아 뜸을 뜨며 숙소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숙소에 오면 뜨거운 샤워와 짐을 푸는 그것만으로도 어찌나 행복한지..... 단순한 일상이야말로 얼마나한 축복인지,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걸 보니 이제사 순례자의 마음 가짐을 갖게 되는 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