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65세 할머니의 몸부림친 여행기 32
< 빨간 X 표 >
7/6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어제 리들에서 사온 컵라면 두개와 커다란 요거트 두개를 아침으로 해치웠다. 큰 배낭을 보내고 비가 좀 그치면 떠날까하여 그 사이에 뜸을 떴다.
이곳은 호텔이라 11시까지 퇴실하면 되기에 비가 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피레네(Pyrenees )의 중턱에 있는 오리손 산장으로 가는 날이다. 8키로 정도 될 거라니 좀 천천히 출발해도 될 듯하다.
10시 30분쯤 되니 비가 그친다. 우린 얼른 출발했다.
'8키로 정도면 뭐......' 마음도 가볍게 나섰다. 하지만... 맘대로 되는 일이 있겠는가? 우리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두 시간 이상 오르막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다행히 비도 안 오고 기온도 19도 내외로 덥지는 않았지만 습도가 높아서 인지, 계속되는 오르막에 땀이 흘러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기가 막혔다. 올라갈수록 피레네 산맥은 굽이굽이 초록으로 펼쳐지고 비가 온 뒤에 운무가 올라가는 모습이 한 폭의 서양화다. (산의 모양새가 절대 동양화는 아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저 아랫동네에나 살 것 같이 높디높고 넓디넓은 산의 모습은 거의 압도적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감탄에 감탄. 또 어서 산장이 나오기만을 고대하며 열심히 올라갔다.
흰줄 하나, 빨간 줄 하나가 그려진 표식이 우리가 가야하는 GR65의 길이다.
이 두줄만 있으면 마음 놓고 가도 된다.
빨간 X표가 있으면 가지 말라는 표시이다. 이 두가지 표시는 내게 안정감을 준다.
까미노를 걸은 후에 내게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내 머릿 속에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충동적으로 떠오르면 나는 얼른 빨간 X표를 마음으로 그리는것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본다.
'이젠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테야!'
드디어 오리손 산장이 보일 때의 감격이란!
춤이 절로 나왔다.
산장 문을 들어서는데 다시 부슬거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세상에나! 우린 또 얼마나 시간을 잘 맞춘 것인가. 우리가 산장에 들어가자마자 내리던 비는 그 후로 어찌나 내리는지 온 세상이 하얀 안개구름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이 비를 맞으며 안개속을 걸을 뻔했다. 어디서나 그분의 도우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천방지축 아무 것도 모르는 체 뛰쳐나온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시간을 잘 맞출 수 있단 말인가.
산장은 한방에 이층 침대 세 개로 모두 여섯 명이 자게 되어 있었는데, 아래층 침대 세 개엔 벌써 사람이 들어와 있다. 애들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 삼십년 전에나 올라가보고는 처음인 이층침대를 영차영차 올라갔다. 새벽에 화장실 가고프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일부러 세 번 정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해보았다.
샤워를 하자니 코인 하나를 주면서 구석 벽에 달려있는 양철통에 넣으라는 거다. 그러면 5분간 물이 나온단다. 그 5분 안에 모든 걸 다 끝내야 한다. 긴장해서 코인을 넣고는 어찌나 빨리 (물론 대충) 씻었는지 5분도 넉넉한 듯 시간이 남았다. 빨래도 못해서 오늘 입었던 옷을 그냥 말려 입어야하나 고민했다. 그동안 얼마나 잘 누리고 살았는지 돌아봐 진다.
게다가 이 나이에도 처음인 게 이리 많은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하지만 처음이든 나중이든 저녁밥 든든히 먹고 침낭까지 꺼내 따땃하게 덮고 누우니 배부르고 등 따시고 부러울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