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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세계의 지도자를 찾아서 4

by THE RISING SUN

중국은 물리적으로 한반도와 붙어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배제하기가 불가능한 나라다. 그리고 시진핑 시대 들어 본격화된 ‘중국굴기’가 계속된다면,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로 갈수록 한국에게 중국이 갖는 의미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일반적 감정은 불편함이다. 사회주의 국가이고, 북한의 혈맹이고, 한한령(限韓令)으로 대변되는 적대적 경쟁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와 조선 조정이 재조지은(再造之恩),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같은 철없는 명분론에서 깨어나, 초강대국이었던 청에 대한 정신승리일 뿐인 유치한 반감에서 벗어나, 소현세자가 가지고 들어왔던 청의 과학기술, 상공업 등 실용주의를 연구하고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오늘날 중국굴기의 뿌리는 덩샤오핑이다. 중국을 대하는 현재 우리의 관점이 아닌, 이념적 사회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당시 중국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그는 분명 세계적 지도자다.


1976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혁명과 전쟁의 시간은 지나가고, 세계는 산업과 기술, 자본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황폐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됐고,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다. 누구도 이 대륙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 키가 150cm에 불과했던 한 작은 노인이 조용히 전면에 나섰다. 덩샤오핑(鄧小平)이다. “고양이는 색깔이 아니라 쥐를 잡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 실용주의자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04년 8월 22일 청 쓰촨성 광안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덩셴셴(鄧先聖)이다. 부친 덩원밍(鄧文明)은 향신(鄕紳) 출신으로, 신학문에 관심이 많아 지역 사회에서 개혁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모친 단빙시(淡冰石)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가정을 돌보았다. 덩샤오핑은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덩샤오핑은 고향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우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이후 충칭(重慶)에 위치한 충칭학교(重慶學校)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사상에 큰 흥미를 느꼈으며, 특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마도 이러한 관심이 그의 유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19년, 덩샤오핑은 중국 정부와 프랑스 간의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5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안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동시에 학업을 이어갔다. 언어 장벽과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학업은 순탄치 않았지만,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저우언라이 등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1924년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26년, 덩샤오핑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중산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설립된 기관으로, 중국 혁명가들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혁명 전략을 체계적으로 학습하였으며, 다양한 국제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시야를 넓혔다. 그러나 소련 내 정치적 갈등과 중국 혁명 노선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1927년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혁명 활동에 투신했다. 1929년, 그는 광시성에서 바이써(百色) 봉기를 주도해 홍군(紅軍)을 조직했고, 이는 중국 남부 지역에서의 공산당 세력 확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홍군 제7군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어 군사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진행된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하여 극한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지도력과 인내심을 더욱 단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였고, 덩샤오핑은 팔로군(八路軍)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어 태항산(太行山)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의 전략적 지휘 아래 팔로군은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이는 공산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재개되었다. 덩샤오핑은 중원(中原) 지역에서의 군사 작전을 지휘하며 국민당 군대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그가 대승을 이끈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진행된 회해전투(淮海戰鬪)는 국공내전 3대 전투 중 하나다. 이 전투에서 55만 5천 명을 잃은 국민당은 대만으로의 피난(국부천대)을 준비하게 된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당내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덩샤오핑은 중앙에서 빠르게 입지를 굳혀갔다. 그는 1952년 중앙인민정부 재정부 부부장, 당 조직부 부장 등을 역임하며 행정과 조직 양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56년에는 제8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겸 총서기(당의 사무총장 격)로 임명되며 사실상 당 운영을 총괄하게 된다. 능력 중심의 실용주의적 태도, 간결하고 단호한 말투는 그를 마오쩌둥의 눈에 띄게 만들었고, 이 시기 확립된 ‘실천이 기준이다.’는 덩샤오핑의 국정 철학은 이후 그가 중국을 이끄는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덩샤오핑의 정치 인생에 큰 고난을 안겨주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부르주아적 경향을 비판하며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당의 고위 간부들이 차례로 실각했다. 덩샤오핑 역시

‘중국의 제2인자’로 부상한 권위가 오히려 화를 불렀다. 그는 1967년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장시(江西)성 신위(新余)의 트랙터 공장으로 하방(下放)되어 노동 개조를 받게 된다. 첫 번째 실각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의 유능함을 무시하지 못했고, 1973년, 저우언라이 총리의 건의로 덩샤오핑은 정치국 위원으로 복귀하며 재등장한다. 저우언라이가 암 투병으로 국정을 이끌 수 없게 되자, 덩샤오핑은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하는 부총리로서 내정을 장악했고, 국방·공업·과학·교육·외교 등 각 분야의 정상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후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애도 시위에서 시민들이 저우언라이를 애도하며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사인방(四人幇)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자, 덩샤오핑은 그 배후로 지목받아 또다시 실각한다. 1976년 4월, 두 번째 실각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사인방이 체포되자, 정치 구도는 급변했다. 권력의 공백기 속에서 당내 실무 중심파와 군부는 덩샤오핑의 복귀를 지지했고, 결국 1977년 7월,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과 군사위원회 부주석, 중앙당교 주임 등 핵심요직에 전격적으로 복귀한다. 부강한 중국의 꿈을 안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 지 58년 만이고, 공산당을 이끌며 중국 전역을 전전했던 대장정으로부터 43년 만이다. 이로써 덩샤오핑은 완전한 권력 복귀를 달성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중국은 폐허였다. 그는 물었다. “왜 우리는 가난한가?” 그리고 답했다. “이념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다.” 그리고 중국을 바꾼 ‘개혁개방(改革開放)’이라는 한 문장이 중국을 뒤흔든다. 덩샤오핑은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이후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게 된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은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며 중국의 현대화를 위한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으로, 계획경제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시장 기능을 적극 활용하여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개혁 초기 먼저 농업부문에 생산책임제가 도입됐다. 집단농장에서 각 가구가 경작지를 책임지고 생산하도록 하는 제도로, 농민들은 국가에 일정량의 생산물을 납부한 후 잉여 생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크게 높였다. 농업 생산량은 최소 5배 이상 급증했다. 이데올로기의 화신인 마오쩌둥이 수천만 명을 기아로 내몰았던 대약진운동의 깊은 상처가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로 비로소 치유되고 있었다.


산업부문에서는 국영기업에 대한 자율성을 확대하고, 민간기업의 설립을 장려했다. 이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외국인 직접 투자(FDI)를 유치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 경제특구를 설립했다. 대표적인 경제특구로는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등이 있으며, 이 지역들은 이후 중국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선진국들에 지도부를 파견해 발전상을 연구하게 한 후 당 고위기구에서 도입방안을 결정했다. 특히 싱가포르와 일본의 산업화가 모델이 됐다.


이러한 개혁개방 정책의 결과, 1979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약 1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또한, 약 1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지역 간 발전 격차, 환경오염, 부정부패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덩샤오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통한 실용주의적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거듭나며 무역 규모 세계 1위 국가로 도약했다.


개혁은 정치분야에서도 추진됐다. 1980년 8월 18일, 덩샤오핑은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과 국가 지도 체제 개혁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관료주의와 권력 집중의 문제를 지적하며, 권력 분산과 집단 지도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도자들의 임기 제한과 민주적 중앙집권제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2년에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어 국가 기관의 기능과 시민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하였다. 공산당 일당 체제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독재의 덫 앞에 견제와 균형의 바리케이트를 친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가로막는 기존 정치 체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1986년에는 정치 개혁을 연구하기 위한 5인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여기에는 자오쯔양, 후치리 등 개혁파를 참여켰다. 이들은 행정 효율성 향상, 당과 정부의 역할 분리, 그리고 관료주의 타파를 목표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이러한 개혁이 서구식 다당제 도입이 아닌,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개혁파 지도자들이 실각하면서 정치 개혁은 중단됐다. 이로 인해 계획된 일부 개혁 조치들이 시행되지 못했지만, 1980년대 초반에 도입된 임기 제한, 집단 지도 체제 등의 제도는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덩샤오핑의 정치 개혁은 중국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당과 국가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일부 개혁이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중국 현대 정치 체제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경제와 정치를 바꾼 개혁개방의 영향은 중국 사회 전반으로 뻗어나갔다. 이후 중국 사회는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서구의 문화와 사상이 유입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소비문화가 형성되었고, 교육 분야에서도 해외 유학이 장려되어 많은 중국 학생들이 해외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연구와 투자가 확대되고, 해외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의 산업 경쟁력을 강화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이후 중국이 세계적인 기술 강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이 됐다.


이러한 중국의 실체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한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때문이다. “빛을 감추고, 힘을 기르며, 절대 나서지 말라.”는 역시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외교 전략이다. 그는 방어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전술을 펼쳤다. 1979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일본과도 협력체계를 구축했지만 과시하지 않았다. 소련과의 국경문제를 협상으로 정리했고, 홍콩 반환 문제는 영국과의 15년 협상 끝에 1997년 ‘일국양제’로 타결했다. 그는 냉전 구도를 기회로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평화적 부상을 추구하였다. 이는 다른 국가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경제 발전에 집중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덩샤오핑의 눈부신 빛 이면에는 짙은 어둠도 있었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덩샤오핑은 자유화 요구를 ‘혼란’으로 규정했다. 군은 발포했고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국제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서방 세계의 대중 제재가 시작됐다. 어떠한 변명도 용납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이고, 그간 덩샤오핑이 쌓아온 모든 업적을 핏빛 물거품으로 만드는 실책이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1992년 광둥성 지역을 순회하던 덩샤오핑은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남긴다. “개혁을 멈추지 말라.”는 이 한마디에 중국공산당과 후임자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중국 경제는 다시 살아났다. 그는 공식 직책 없어도 여전히 건재했고 권위는 막강했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자였지만, 상주의자가 아닌 실용주의자고, 사상가라기보다는 엔지니어였다. 현실을 정확히 읽고, 필요한 도구를 찾아내 실행하는 데 탁월했다. 그는 마오쩌둥처럼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았고, 서구처럼 민주주의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국가의 생존과 부흥’에만 집중했다. 그의 전략은 장기적이었고, 그의 리더십은 절제된 카리스마였다. 적이든 아군이든, 그를 과소평가했던 자들은 결국은 그의 깊이를 깨달았고, 그의 승리를 인정해야 했다.


덩샤오핑은 실패한 공산주의 속에서 기적을 창조했다. 그는 유토피아를 말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시작해 조용히 혁명을 완성했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하나로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그 나라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의 업적은 아직도 계속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덩샤오핑 이론’, ‘도광양회’, ‘남순강화’는 지금도 계승되어 실현되고 있다. 역사는 그를 공산당의 반역자가 아니라, ‘현대 중국의 진정한 설계자’로 기억한다. 작은 키, 조용한 말투, 무심한 표정 뒤에 숨겨졌던 강철 같은 실용주의, 그것이 덩샤오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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