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도자를 찾아서 5
정도전은 혁명가다. 혁명의 토대와 방향을 제시한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직접 돌격하는 행동가다. 그는 정치인이면서 학자이고,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실무자다. 그래서 그는 이상이 아닌 현실에 기반한 실용주의 정치를 펼쳤고 실질에 기반한 학문을 했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 훨씬 이전에 정도전이 있었고, 또한 다방면에 다재다능해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정약용 훨씬 이전에 정도전이 있었다.
정적이었던 이방원은 정도전을 조선의 역사에서 파냈으나 그는 파내질 수 없었다. 그가 곧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살아남아 그를 전하고 있다. 먼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다. 조선의 국가철학이 담긴 헌법이면서 동시에 통치 체제의 설계도인 국정 매뉴얼이다. 치전(治典/吏典), 부전(賦典/戶典), 예전(禮典), 정전(政典/兵典), 헌전(憲典/刑典), 공전(工典) 등 6전으로 구성되어 입법, 행정, 재정, 인사 등 6조의 행정 조직 원리, 운영 기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추가로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해 ‘치전’을 보완했고, 후대에 <경국대전>으로 이어졌다.
다음은 <불씨잡변(佛氏雜辨)>이다. 단순하게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조선의 통치 철학인 유교 사상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고려 말의 다양한 사회적 병폐들의 사상적 원인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정도전은 철저하게 실학적 관점에서 유교에 접근하여 <학자지남도>, <심문천답>, <심기리면> 같은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그 연장선에서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정립하려는 의도였다.
다음은, <진법(陳法)>이다. 병법서다. 조선의 군사 조직, 부대 편제, 진형, 전략 전술 등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또한, 현장(賢將), 지장(智將), 용장(勇將)으로 장수의 재목을 구분하였고, 사졸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엄격함보다는 인간적인 면에 중점을 둘 것을 강조했다. 잘 먹이고 잘 입힐 것, 노고를 덜어줄 것, 병과 상처를 치료해 줄 것, 불구자를 어여삐 여길 것, 죽은 자를 애도할 것 등의 다섯 가지 방법을 열거하고 구체적인 시행방법까지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정도전의 시문집인 <금남잡영(錦南雜詠)>과 <삼봉집(三峰集)>이다. 앞서의 저작들이 학문적, 정치적 성격이 짙은데 반해 문학적이고 감성적인 저작들이다. 금남잡영은 나주 유배기에 쓴 것으로 정치적 시련기의 소회와 극복 의지가 드러난다면, 삼봉집에는 평생에 걸쳐 쓴 부, 오언·칠언고시, 율시, 악장, 소, 서, 기, 제문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글들이 담겨 있어 그의 예술가적 기질과 성취를 경험할 수 있다. 삼봉집의 경우 1791년 정조의 명에 따라 14권 7책으로 규장각이 다시 편찬하였다.
혁명가 정도전이 활약했던 14세기의 한반도는 현실에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이벤트들이 망라된 공간이었다. 한 왕조가 망해가고 있었고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분열이 있었다. 외세는 원(元)에서 명(明)으로, 내부는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주도권이 이동하는 시기였다. 외교에서는 자강(自强)과 사대(事大)가 충돌했고, 내정에서는 존치와 개혁, 다시 개혁에서는 온건과 급진이 부딪혔다. 총체적 카오스의 시대였다.
스러지는 고려와 일어나는 조선이 맞물려 돌아가는 극한의 무질서 속에서 정도전이 새로운 질서의 근본이자 총아(寵兒)로 제시한 것이 <재상론(宰相論)>이다. 조선경국전의 치전편에 규정되어 있다. <재상론>은 왕의 권한을 명목상으로 제한하고 실권을 재상에게 위임한다는 점에서 입헌군주제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한편으로는 의원내각제의 성격도 띤다. 재상에 대한 지명권도 왕에게 있지 않다.
백성들 중에서 인성을 닦고 학식을 쌓은 사대부들이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다. 1차 검증을 통과한 관료들은 자유로운 경쟁 안에서 그 인품과 역량에 대한 2차 검증을 받는다. 그렇게 검증의 검증을 통과한 자들 중에서 인품이 가장 훌륭하고 역량이 가장 뛰어난 자가 재상이 된다. 물론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동료들의 다면평가와 인정이 전제되고 왕은 다만 임명권을 행사해 최종 승인할 뿐이다.
정도전이 <재상론>을 구상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인 14세기 초반이다. 동양은 몽골족이 세운 원이 지배하는 시기였고, 서양은 200여 년간 이어졌던 십자군 전쟁이 막 끝나고 중세의 끝이랄 수 있는 흑사병과 백년전쟁을 앞둔 시기였다. 계몽과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기 훨씬 전, 여전히 힘과 본성이 지배하던 암흑의 시대에 한반도에서 솟아오른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그리고 지극히 실용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총체적 카오스의 시대에 던져진 희대의 혁명가는 오직 본능에 충실한 생명체처럼 창업(創業), 수성(守成), 경장(更張), 쇠퇴(衰退)의 사이클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국가의 생리를 정확히 간파했다. 그 안에서 살아 작동하는 권력의 속성, 목적이었다가 수단으로 전락하는 정치의 실체를 목도했다. 그리고 정작 주인인 백성들은 늘 굶주리고 병들었다가 종국에는 전쟁터로 내몰렸다. <재상론>은 이 역사 실패의 사슬을 끊을 근본적 해법이자 영구적 태평성대를 열 실효적 대안이었다.
또한 <재상론>에는 오늘날의 정치 체제 원리들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권력이 신분에 의해 혈통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국민주권의 원리가 들어있다. 혁명의 원동력인 문제의식이 백성으로부터 비롯됐던 만큼 궁극적 지향점은 ‘민본주의(民本主義)’였다. 실제로 정도전은 당시 모든 경제활동의 근간인 토지를 백성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주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을 주창했다.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도 들어있었다. 왕은 재상의 견제를 받고, 재상은 사헌부의 견제를 받는다. 또한 재상을 왕 개인이 아닌 관료 집단의 뜻을 반영해 결정하는 만큼 다수결의 원리도 들어있다. 이방원에 의한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제정되어 신분제가 굳어지기 전으로, 과거를 볼 수 있는 백성은 누구나 자격이 있었으므로 완벽하진 않지만 자유권, 평등권도 보장됐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절차는 법에 근거하므로 법치주의 원리는 <재상론>의 근간이 된다.
<조선경국전> 치전편 총서에 기술된 <재상론>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의정부 서사제를 통해 백관을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린다. 이를 위해 재상에게는 인사권, 군사권, 재정권, 포상·형벌권 등 강력한 권한이 있어야 한다. 권력의 중심은 총재(冢宰)에게 있어야 한다. 세습되는 군주가 반드시 현명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 만민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재상의 자질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正己), 임금을 바르게 하고(正君), 사람을 가려서 쓰고(知人), 일을 공정하게 처리(處事)할 수 있어야 한다.
정도전은 조선에 그의 전부를 걸었다. 단순히 나라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고, 다시는 망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민본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혁명의 요체는 <재상론>이다. 그걸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벗, 정몽주까지 내주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조선을 제대로 된 나라로 만들어야 했다. 반드시 <재상론>을 관철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훗날 하늘에서 벗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대에 그의 사상은 너무도 급진적이었고 비상식적이었기에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이성계를 제외하면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정도전은 하나씩, 하나씩 밀어붙였다. <재상론>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혁명의 요체라면, 그걸 현실 세계에 구현한 것은 수도 한양이다. 정도전은 천도에서부터 설계, 그리고 경복궁, 육조거리, 종묘, 사직단, 사대문, 사소문의 배치와 작명까지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유학에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이라는 뜻의 ‘유종공종(儒宗功宗)’의 친필과 거북이 등딱지 무늬의 가죽옷인 ‘귀갑구(龜甲裘)’를 하사했다.
<재상론>, ‘민본주의’와 함께 정도전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정치 이념은 ‘자강(自强)’이다. 중화(中華)와 사대(事大), 허울뿐인 명분과 유약한 문치(文治)로 일관하다 끝나버린 정도전 없는 조선이 더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자주, 자립, 자강은 확고했다. 자립을 위해 원에 대한 전쟁을 불사했듯이, 자주를 침해하는 명에 대해서도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중앙집권화와 국방력 강화가 필요했다. 공신,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합동군사훈련을 추진했다.
역사는 정도전의 혁명이 진짜 혁명이고, 정도전이야말로 진짜 혁명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모든 혁명의 유효기간은 권력을 잡을 때까지다. 집권과 동시에 기득권이 되고 보수화된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고 정치의 실체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러지 않았다. 미완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의 혁명은 그 스스로도, 동지들에게도 기득권화, 보수화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혁명에 완결이란 있을 수 없었고 개혁은 계속됐다. 그래서 정도전은 어쩌면 성공했지만 변절하지 않은 역사상 유일한 혁명가다. 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했던 혁명의 동지들은 적으로 돌아섰다.
그중에서도 이방원의 적의(敵意)는 높고 날카로웠다. 혁명이 위기에 처한 결정적 순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방원이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인질이 될 뻔했던 가족들을 살렸고, 사냥에서 낙마해 부상당한 이성계를 구했고, 정몽주를 죽여 반격을 무산시켰다. 사실상 조선 개국의 특등 공신이다. 하지만 공신록에서 배제됐고 세자의 위는 배다른 막내 동생인 이방석에게 빼앗겼다. 그 배후에는 <재상론>으로 왕권을 도적질 하려는 정도전이 있다고, 이방원은 믿었다.
1398년 이방원은 난을 일으켰다. 그때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남은(南誾)이 새로 들인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송현방(松峴坊), 지금의 종로구 송현동이다. <재상론>, 사병혁파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민본의 나라를 세우고 자주, 자강을 위해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있었다. 방심이었고, 기습이었다. 실록은 그의 죽음을 비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방원에게 구명을 청할 것을 권하는 아들 정담(鄭湛)에게 “그렇게 한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라고 하며 ‘자조(自嘲)’라는 시 한수를 남겼다.
마음 다잡아 성찰하며 온통 공을 다해 살면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은 위업이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
操存省察兩加功
不貧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