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총아이자 총체인 왕의 학교
우리는 누구나 성공한 인생을 원한다. 더 나아가 행복한 인생을 원한다. 현재의 행복은 과거의 불행을 덮는다. 현재는 바꿀 수 있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현재를 통해 과거가 미치는 영향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부정적 과거는 긍정적 과거가 될 수 있다.
인생은 우리의 뜻에 따라, 의지대로,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을 채우려는 시도와 그것을 벗어나는 일들이 뒤섞인 조용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노력이 헛되지는 않지만, 또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인생의 요체는 뜻밖의 불행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있다. 행복은 따로 대처할 게 없다. 그냥 누리면 되는 거다. 불행을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게 할지, 대역전극을 펼칠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대처에 달려있다.
다시,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 한편 현재는 언제나 마지막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의 진정한 성공 여부는 자식농사로 결정된다, 훌륭한 자녀를 두었다면 행복한 인생이라고들 말한다. 결혼도, 출산도 쉽지 않은 시대다. 행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일반적 지향인데, 자녀를 갖는 일이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은 시대에 행복의 척도에 자녀를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자녀를 낳아 한 사람의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우는 것이 그 부모에게 가장 큰 행복일 것임은 당연하고, 더불어 그건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도 큰 축복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사람이다. 훌륭하게 자란 한 인간은 사회를 넘어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다. 반면에 비뚤어진, 그 반대되는 한 인간이 사회를 넘어 인류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력화시킨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한 인간이 인류 전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를 거의 무한대로 늘려놓았다.
또한, 한 사람이 부모의 가르침 아래 성장하여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과정은, 부모의 양육이라는 요소를 제거해도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삶이다. 결혼, 출산과 무관한 우리에게도, 우리 자신의 삶에도 분명 전달하는 교훈들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속 발전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반복된다. 과거의 인간이든 현재의 인간이든 생명체로써의 본성, 그걸 뛰어넘는 이성,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감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기제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리고 살아간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다들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부모가 원하는 바람직한 자녀 상으로 세종(世宗) 정도면 아주 훌륭하지 않을까. 그의 삶에도 수많은 굴곡이 있었고, 아픔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는 분명 태종(太宗)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문(文)과 이(理)는 물론 예술까지 통달한 전인적 인간이었으며, 비뚤어지지 않은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나라 전체에 태평성대를 드리운 성군이었다.
만약 내 자녀가 국어, 영어, 역사는 물론 수학, 과학도 잘하고, 미술이나 음악에도 조예가 뛰어나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교만하거나 편협하지 않고, 때로는 부모의 부족함까지 이해하고 감쌀 만큼 따뜻한 성정을 지녔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렇게 성장한 자녀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에 올랐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텐데, 그 자리에서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쳐서 누구에게나 칭송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 있을까. 한 가지가 더 있을 수 있겠다. 이른 나이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많은 손자, 손녀들을 낳아서 품에 안겨주기까지 했다면.
그렇다면 세종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훌륭한 자녀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 안에서 역사의 한 장 한 장을 만들어나가는 인간들은, 본성, 이성, 감성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 박제된 인물들의 삶은 분명 검증된 법칙성을 띤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들은 우리의, 또한 우리 자녀들의 현재, 미래가 될 수 있다.
특히 오늘날은 많이 낳지 않고, 낳아서 귀하게 키우는 시대다. 어쩌면 모두가 왕의 아들, 딸처럼 키우는 시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을 귀하게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귀한 자식일수록 고생을 시키라는 옛말이 있다. 어떻게 키우는 것이 진정 귀하게 키우는 것일까.
비싼 옷을 입히고, 많은 과외를 시키고, 거친 삶의 경험은 모두 차단해 주는 것이 과연 귀하게 키우는 것일까. 언젠가 부모가 떠난 세상에서 스스로 자립해야 하고, 또 언젠가는 자녀를 낳은 부모가 될 그들을 가장 귀하게 키우는 것은 세상에서 단단하게 혼자 설 수 있는 능력,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거친 풍파에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식을 귀하게 키우는 것은 결코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니며, 부모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나의 귀한 자식이 남에게도, 세상에서도 귀한 존재가 되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존귀한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길 원한다면 달리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들이 왕처럼 귀한 이 시대에, 왕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았고,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왕이 되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에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보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다.
한 나라의 왕의 자녀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수도 있는 아이다. 당대에 가장 훌륭하다는 스승들, 귀하고 대단한 책들, 그 외에도 검증된 최고의 방법들을 얼마나 총동원했을 것인가. 왕의 학교는 가히 당대 교육의 총아였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3세 과외, 4세 영어유치원, 사립초등학교를 거쳐 최고 명문 중고등학교에 보내는 격이다. 물론 국영수부터 예체능까지 고액 과외도 포함되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이 모두 훌륭한 왕이 되지는 못했다. 지나친 기대와 사랑은 사도세자 같은 비뚤어진 인간을 만들어냈다. 본인에게도, 영조에게도, 그리고 세상에게도 얼마나 비극인가.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 정조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연산군, 선조, 인조가 있었고, 소현세자, 효명세자가 있었다.
내 아들, 딸이 세종 같은 인물이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세종 같은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왕이 다니는 학교, 왕이 될 수 있는 학교, The King's Schoo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