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탄생, 나의 시대, 내 자녀의 시대는
변화의 속도가 빠른 오늘날에도, 태어난 시대는 한 인간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길게 보아 100년 정도인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대로 당대의 일부분이다. 시대에 순응하든, 시대에 맞서 싸우든, 개인은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시대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시대가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야 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시대를 고려하지는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적으로 작은 성공,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일상에 만족한다. 반면에 시대의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도전과 모험을 즐긴다.
한 인간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크게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것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것 정도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이성계가 태어난 1335년은 혼란의 시대였다. 국내외 정세가 총체적으로 요동치는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이성계는 1335년 11월 4일 고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화령(회령)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1315 ~ 1360)과 어머니 영흥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5남 2녀 중 3남이었고, 이자춘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최씨가 낳은 1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고려 북부지역에 설치한 통치기구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였다. 1335년은 1313년에 즉위했던 충숙왕(忠肅王)이 원나라에 의해 1330년 왕위를 빼앗겼다가, 1332년에 복위한 직후였다. 고려의 왕권은 원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원나라가 고려 견제를 위해 임명한 심양왕(瀋陽王)과 끊임없이 다퉈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만주의 중심이었던 심양은 원나라가 끌고 간 전쟁 포로, 이주민 등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고려인은 고려인이 다스리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원나라는 심양왕을 임명했다. 당시 고려의 주권은 자주적이지도 않았고,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1335년은 쇠퇴기에 접어든 원나라에게도 혼돈의 시간이었다. 1333년 13세로 즉위한 순제(順帝)의 치세 초기로, 실권은 재상 바얀(伯顏)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에 황후 다나시리(答纳失里)와 그녀의 아버지이자 권신인 엘테무르의 가문이 숙청됐고, 당시 후궁이었던 기황후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또한 몽골 연합의 서방을 담당했던 아부 사이드가 사망하면서 일 칸국은 사실상 붕괴된다. 당대의 세계 그 자체였던 원나라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이성계는 사실상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에서, 그 강대국이 흔들리며 영향력을 잃어가는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내 나라는 힘이 없고, 다스리던 나라가 흔들리면서 생긴 힘의 공백을, 또 다른 힘들, 즉 홍건적, 여진족, 왜구 등이 점점 채우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수많은 힘의 톱니바퀴들이 쉴 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틈바구니에 끼인 개인은 그 사이에 끼어 갈리거나, 스스로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인데, 다행히 이성계는 후자에 해당될 수 있었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1180 ~ 1274)는 1255년 원나라 몽케 칸으로부터 천호(千戶)와 다루가치(達魯花赤) 벼슬을 하사 받는데, 그 두 벼슬은 이후 대대로 세습된다. 천호는 원나라의 십호제(十戶制) 군사·행정 단위에서 약 1,000호를 거느린 지방 장관으로 군사 지휘와 치안·징세까지 담당했다. 또한 다루가치는 정복지에 파견되는 원나라 황실 직속 관리로 세금 징수, 군정, 사법 등을 감독했다. 즉 이성계의 집안은 100여 년 동안 고려 북부지방을 장악한 토호이자 군벌이었다. 약소국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강대국의 벼슬아치였다.
이성계가 태어난 1335년, 그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대체로 이런 상황이었다. 고려 무신정권을 열었던 이의방(李義方)의 동생인, 6대조 이린(李隣) 이래 일관된 정체성으로 유지 돼왔던 무인(武人) 집안에서,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의 장자로 태어났다. 폭정에, 전쟁에 휘말려 누구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일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던 격동의 시대에, 하나의 당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가문의 일원으로, 시대의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뛰어들어야 할 운명을 안고, 그렇게 이성계는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