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부합하는 경쟁력

by THE RISING SUN

오늘날 국가의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단일한 기준을 내세우기는 어렵고, 복합적일 것이다. 경제력, 과학기술력, 군사력 등이 목록의 상위에 랭크될 것이고, 그 외에 인구의 수나 영토의 크기, 정치력, 외교력 같은 것들도 중요하다. 최근엔 문화력도 아주 핵심적인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전 근대 시대의 국가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력, 현대식 표현을 쓰자면 군사력이었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교체하는 명예혁명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력은 장막 뒤로 한발 물러나 슬쩍 실루엣만 드러내는 형식의 힘이 됐지만, 여전히 강대국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다. 다만, 더 이상 대놓고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는 선거로 권력이 교체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은 명분 없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세상이 됐다.


또한 통신, 교통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이 됐고, 각 나라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이합집산을 한다. 모든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됨에 따라 특정 지역에 제한된 비밀스러운 국지전은 있을 수 없고, 외교력, 경제력을 이용해 상대를 견제하거나 제압할 수도 있어서, 군사력은 더 이상 강대국의 자격을 결정하는 제일의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성계가 살던 시대의 무력은 곧 국력의 총체였다. 물론 그때도 한 나라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척도로 문명이라는 게 있었고, 명분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평화로운 시기에 해당하는 얘기다. 그때는 말 그대로, ‘The Winner Takes It All’이었다.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래서 왕조 교체기 등 혼란한 시기에는 무인들이 권력을 차지했다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무(武)에 의해 무너지고, 다 빼앗기는 상황이 반복됐다.


나만 남을 침략하지 않으면 지켜지는 나라와 백성이 아니다. 남의 침략을 막는 것이 국가 수호의 핵심이기에, 문명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또한 그걸 지켜내는 것도 무력으로 침탈하려는 세력으로부터의 안전이 전제될 때만 가능하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강한 무력을 유지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무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무력이었다. 6대조인 이안사가 동북면에 정착해 고려 조정으로부터 의주병마사로 임명되고, 이후 두만강변으로 이주해 원나라로부터 5천호소의 다루가치 벼슬을 하사 받은 이래, 무력은 세습됐고 이성계는 이어받았다.


이성계는 선대로부터 흘러온 유산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었다. 그가 무인으로서 내재한 자질과 역량은 물론, 형성했던 군벌이 가진 힘의 총량도 가히 한반도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크기였다. 더욱이 그 무력은 한 가문을 지키고, 한 지역을 다스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건 만약이다. 고려 후기에 중화(中華)를 핵심 이념으로 하는 성리학(性理學)이 유입되지 않았고, 그래서 조선의 통치 철학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명(明)에 대한 사대(事大), 문(文) 중심의 관료제, 실용을 배제한 명분론, 학문과 농업을 중시하고 공업과 상업은 천시하는 풍조 따위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직 권문세족, 친원 세력 등 고려를 망가뜨렸던 부정적 요소들만을 제거하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실용주의들, 즉 황제를 칭하고 자체 연호를 사용하던 주체의식, 온 나라와 백성들을 하나로 묶었던 호국 불교, 무역과 상업 중시로 이룩한 경제력과 외교력 등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거기에 이성계가 가진 강한 무력과 정치력이 더해진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면 말이다.


만주는 고구려의 땅이었고,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로 인정받고 있었다. 1259년 당시 고려 태자였던 원종이 훗날 원나라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를 찾아가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다. 옛날 당나라 태종도 정복하지 못했는데, 그 태자가 왔으니 하늘의 뜻이다.”라며 환영했다. 당시 원나라는 금(金), 서하(西夏), 대리국(大理) 등을 멸망시켰듯 고려를 충분히 병합할 수 있었다. 더욱이 30년 가까이 대몽항쟁을 벌였던 고려가 독립 왕조를 존속할 수 있게 해줬던 것은 일종의 경외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북방 민족들도, 한족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강한 나라의 정체성은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한번 꺾였다. 신라의 통일은 분명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만, 우리 역사에서 만주가 제거된 근본 원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조영의 발해, 이정기의 제나라가 요동과 요서에서 일어났었고,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민족들과 한족인 홍건적의 침입을 잇달아 막아냈던 고려에서도 만주는 늘 가능성으로 남아있었다. 그랬던 것을 조선이 중화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스스로를 소중화라 여기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성계, 정도전이 살아있던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만주 수복의 가능성은 남아있었다. 명나라 태조가 사대를 명분으로 무리한 요구를 할 때마다 이성계는 크게 반발했고, 실제로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 철학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원리를 성리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분법적 질서론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변방이 된 우리 민족은 정신적으로 한반도에 갇혀버렸다.


다시 돌아와서,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가 아니라, 고려의 실용주의를 계승한 나라였다면, 거기에 이성계의 무력이 더해졌다면, 고구려의 재현은 가능했을까.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청나라를 건국할 때 여진족은 100만 명, 정복당한 한족은 1억 명이었다. 100 대 1의 열세를 극복한 열쇠는 팔기제도(八旗制度)를 통한 강력한 군사조직, 전략적 정치력, 체계적 행정력이었다. 여말선초인 14세기말 한반도 인구는 500만 명 전후로 추산된다. 중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주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4세기 동북아에서 이성계가 가진 경쟁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반도에 국한된 조선 건국에 사용하고 끝내기엔 너무나도 안타까울 만큼. 결국 이성계를 한 나라의 왕으로 만든 것은 시대였고, 그를 한반도에 가둬버린 것도 시대였다. 시대를 읽고, 그 시대에 부합하는 경쟁력을 확보했다면, 다음엔 시대를 뛰어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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