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전통, 가풍
이성계의 어린 시절,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몰 연대를 고려하면 이성계가 태어났을 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은 할아버지 이춘(李椿, 미상 ~ 1342)이었을 것이다. 이춘에게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1315 ~ 1360) 외에도 6남 6녀가 더 있었으니 수많은 손자, 손녀들이 있었을 것이나, 이성계의 인물됨이 어려서부터 남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을 근거로 할 때, 이성계는 아마도 할아버지 이춘의 무릎에서 큰 사랑과 많은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훗날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조(度祖)로 추존되는 이춘은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최 씨가 낳은 두 번째 아들이었고, 전체에서는 4남이었지만, 이행리 사후 그의 천호와 다루가치 벼슬을 세습받는다. 이행리는 안변의 호족이자 장인인 최기열의 도움으로 선대의 벼슬을 되찾고 세력을 재건했기에, 첫 번째 부인 손씨가 아닌 최씨의 소생에게 가문의 수장 지위를 세습했다. 또한 차자였던 이춘이 선택된 것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노년에 중풍에 걸린 이춘은 첫 번째 부인 박씨 소생 장자 이자흥에게 벼슬을 넘기려 했지만 두 번째 부인 조씨는 자기 소생에게 넘기기를 바랐고, 이에 이자흥은 원나라에 직접 가서 자신이 적장자임을 밝힌 후에야 벼슬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두 달도 채 안되어 죽었고, 아들 이천계가 너무 어렸던 까닭으로 그의 지위는 친동생 이자춘에게 넘어간다.
가문의 수장을 결정하는 데 어머니와 외가의 힘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낯설지 않다. 이방원이 일으켰던 ‘1차 왕자의 난’의 직접적 원인은 이복동생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었고, 그 일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신의왕후 한씨는 동북면의 향처(鄕妻)로서 고향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내조했던 반면, 개경의 명문거족 강윤성의 딸이었던 신덕왕후 강씨는 경처(京妻)로서 사실상 이성계의 정치적 동지였다.
또한 적장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가업을 이을 권리가 삼촌에게 넘어가는 상황도 역시 낯설지가 않다. 세종의 차남이었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다.
기본적으로 고려와 조선은 왕위 승계의 원칙이 달랐다. 고려의 경우 태조 왕건 때부터 왕위 계승은 엄격한 적장자 승계로 굳어지지 않았다. 왕위에는 장자뿐 아니라 다른 아들, 심지어 방계까지도 오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광종, 성종, 현종 등은 직계 장자가 아니라 다른 아들 혹은 방계에서 계승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신하들의 세력 균형, 외척, 심지어 불교적 인연 등이 승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왕자의 난 수준의 왕위 쟁탈전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아마도 통치 철학, 사회 지배적 이념이 실용이었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적장자의 명분보다는 왕위를 이을만한 역량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10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 ‘공경장상(公卿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외치는 천민들의 반란이 계속 일어났던 이유도 같은 배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 명분의 나라다. 원칙적으로 무조건 적장자가 왕위를 이어야 하는 나라다. 원칙은 유일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유일함이 무너진 후 채택되는 대안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완전무결한 명분을 가질 수 없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늘 열려있는 숙명이다. 그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해 명분을 내세우지만, 명분은 언제나 실용보다 무력하다. 명분과 실용이 언제나 서로 다투는 이유다. 영원한 딜레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 힘을 가진 왕자가 명분을 가진 왕자의 왕위 계승을 무산시키거나 뒤집는 일들이 벌어졌던 이유는, 전주 이씨 집안의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6대조였던 이안사 이래로 전주 이씨의 가문과 가업은 적장자보다는 힘을 가진 자가 이어받았다. 국내외적으로 극한의 격동기였던 14세기 동북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분이 아닌 실용이었다. 가문의 수장의 자리를 지키고 또한 가문을 지킬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느냐로 증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