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기

건강

by THE RISING SUN

종기(腫氣, furuncle). 부스럼, 등창이라고도 하는 피부질환이다. 원인은 일반적으로 박테리아에 의한 염증반응이지만,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땀샘 감염에 따른 화농땀샘염, 엉덩이 근처에서만 발생하는 모발둥지낭, 청소년기 낭포성 여드름 등도 종기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종기는 눈병과 함께 조선 왕가의 고질병이었다. 왕족, 귀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의식주와 의료혜택을 받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대부분 세수와 같은 기본적인 활동도 궁녀들이 대신해 줄 만큼 운동량은 최소한이었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으로 만든 산해진미로 하루 5번의 수라를 들어 초고칼로리를 섭취했다. 왕과 왕비, 대비 등에게 올리는 상차림인 수라는 보통 12첩 반상으로 일컫는데 첩 수에 들지 않는 국, 김치, 장 등을 포함하면 30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한 음식이 올랐다. 어떻게 보면 많이 먹고 움직이지 않으며 늘 스트레스 안에 사는, 질병에 가장 취약한 환경이었다.


세종 31년인 1449년,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등에 생긴 화농성 종기로 고통받았는데 붉게 부어오른 부위가 30cm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다. 세종은 문종의 치료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도죄(徒罪) 이하의 죄를 저지른 자들은 이유와 판결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사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문종 외에도 세조, 성종, 정조 등은 종기가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효종은 그로 인한 의료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또한 태종, 세종, 연산군, 광해군, 영조, 현종 등 27명의 왕 중 절반 가까이가 재위 중 종기 발병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종기는 전담기구인 치종청(治腫廳)을 설치해 전담하는 치종의들을 양성하고 전문의학서들을 편찬할 만큼 일상적인 질병이었다.


종기와 같은 피부질환 그 자체가 유전되지는 않지만 면역력 저하, 피지분비 이상, 당뇨와 같은 종기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체질적 소인은 유전될 수 있어 가족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낭의 염증이 가장 대표적인 원인이나 피부의 세균 감염을 막아내지 못하고 악화시키는 약화된 면역력도 종기의 결정적 원인이다. 유전적 요인과 함께 항생제가 없던 시대에 왕의 몸이라는 이유로 쇠를 이용한 외과적 처치조차 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정통성 이슈, 외교 이슈, 당파와 정쟁 이슈 등으로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도 큰 원인이 됐을 것이다.


가족력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왕가에서 종기의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태종 때다. 태조는 말년에 뇌혈관계 질환인 중풍으로 고생한 기록이 있고, 정종은 62세로 평균연령이 40대 중반이던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다고 볼 수 있는 자연사로 추정된다. 잠복 중이던 종기가 발현되고 악화되는 원인에는 운동 부족에 따른 비만과 당뇨, 스트레스 등이 포함되는데, 태조는 거의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무인이었고, 정종도 역시 젊은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서 보낸 후 2년여의 짧은 재위 이후에는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냈다.


하지만 태종부터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기 위한 절치부심,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골육상쟁, 왕권 안정화를 위한 피의 숙청, 원경왕후와의 불화, 후계 구도 결정 과정에서의 분란 등 어떻게 보면 평생이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평소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적당한 운동량은 충족했을 수 있으나, 정식 후궁은 9명, 소생이 언급된 후궁들까지 포함하면 총 19명이고, 자녀도 <태종실록>, <선원계보기략> 기준으로 37명에 이르는 걸 보면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영조는 선천적으로 예민한 성격에 어머니 숙빈 최씨의 미천한 신분과 정통성 시비, 형인 선왕 경종 독살설, 이인좌의 난, 첨예한 당쟁, 사도세자의 죽음 등으로 평생 동안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말년에 종기를 앓았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51년 7개월 최장 기간 재위, 83세 최장수라는 2개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


영조의 장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록으로 전하는 것들만 정리해 보면, 첫째, 소식(小食)을 했다. 다섯 번의 수라를 세 번으로 줄이고 간장, 고추장을 반찬으로 먹을 만큼 검소한 식사를 했다. 둘째, 술과 고기를 멀리했다. 영조의 금주법(禁酒法)은 유명하다.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내렸고, 제사 때는 술 대신 생강차나 식혜를 올렸다. 셋째, 끼니를 거르지 않고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회의를 하다가도 수라를 챙겼다고 한다. 넷째, 현미 등 잡곡밥을 먹었다. 19세기 일본에서는 상류층의 도정된 백미 선호 현상으로 ‘사치병’, ‘에도병’이라 불렸던 각기병이 확산됐는데,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도 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다섯째, 산삼 등이 주재료인 약차를 수시로 마셨다. 여섯째, 영조는 한 달에 11.7회 건강검진을 받았다. 승정원 조례에 따르면 내의원 의원이 왕을 문안하고 검진하는 문안진후(問安診候)를 5일에 한 번씩 실시해야 했는데, 영조는 거의 2~3일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았던 것이다. 일곱째, 비단옷 대신 무명옷을 즐겨 입으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


문종, 정조와 같은 훌륭한 왕들이 선정을 펼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펼쳐놓은 중흥의 개혁과제들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건강 문제로 스러져버린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당대의 백성들에게도, 당대를 역사로 바라보는 우리 후손들에게도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한 나라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던 왕이었음에도, 그 훌륭한 덕성도 총명함도 애국애민의 강력한 의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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