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원위(事与愿违)
문종(文宗)은 1414년 11월 24일, 지금의 종로구 통의동인 당시 충녕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종과 소원왕후의 장남이었다. 1414년은 6조 직계제를 시행하는 등 태종이 왕권 강화와 각종 관제 정비를 추진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있던 해이다.
태종은 1413년 기행을 그치지 않던 양녕대군의 대리청정을 중단시켰고, 1415년에는 충녕대군의 사저에 초대된 태종의 공신 남재(南在, 1351 ~ 1420)가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시기에,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고 이야기한 사실을 전해 듣고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역죄로 다스릴 수도 있는 문제적 발언을 태종은 그냥 웃어넘긴 것이다. 아마도 문종이 태어났던 1414년은 세자의 위가 양녕에게서 충녕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대군의 아들로 태어나 왕의 아들이 된 문종은 35세였던 1450년 4월 13일, 지금의 종로구 안국동인 영응대군 사저에서 즉위한다. 세종의 빈전이 설치된 동별궁에서 상을 치르다가 세종 사망 5일 후 상복 차림으로 빈전 밖에서 치른 즉위식이었다. 도중에 아버지 세종을 생각하며 쏟은 눈물로 상복 옷소매가 다 젖었다고 한다. 그리고 즉위 2년여 만인 1452년 6월 10일, 향년 37세로 경복궁 강녕전에서 훙서한다.
문종은 조선의 27명의 왕들 중에서 비교적 존재감이 약한 왕이다. 재위 기간이 2년 2개월로 짧았고, 대왕의 칭호가 붙는 아버지 세종과 애절하고 사연 많은 아들 단종, 그리고 아들의 왕위를 뺏어간 야심가 아우 세조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기억 속에는 문약하고 조금은 우유부단했던 왕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문종은 명분과 실질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준비된 왕이었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왕이었고 할아버지 태종이 외척과 권신들을 정리한 상태에서 아버지 세종은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 한글을 위시해 제반 문물의 창대한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에 더해 태평성대를 완성할 군주로서 손색이 없는 품성과 실력을 갖고 태어났다. 문종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안에서 여색에 빠지거나 밖에서 사냥에 탐닉하고, 혹은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길 좋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대궐 같은 집을 지어 화려하게 치장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왕이라면 누구나 자기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타고난 성격상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니 권해도 잘할 수가 없구나.”
그 외에도 문종에 대한 평가는 미담 일색이다. 문종은 세종을 닮은 큰 체격과 풍성한 수염으로 외모가 수려했다고 전하는데, 11살이던 1425년 명나라 사신들에게 베푼 하마연에서 사신들은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하므로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고 문종의 외모와 의젓함을 찬미하였다. 또한 앵두를 좋아하는 세종을 위해 궁궐 곳곳에 앵두나무를 심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도 유명했다. 늘 점잖고 사려 깊었으며 아랫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종은 또한 세종만큼이나 다방면에 탁월한 르네상스맨이었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모두 능했고 경서, 천문, 음악, 지리, 군사, 역산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공부와 연구와 매진해 다양한 업적들을 남겼다.
세자 교육 없이 바로 왕위에 올라 부족함을 느꼈던 세종은 문종이 7살 때 세자로 책봉한 후 스스로 교육 과정에 전반에 개입하며 철저한 과정을 밟게 했다. 하루 3번씩 열렸던 서연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어떤 책으로 가르칠지를 일일이 결정했고, 주역(周易)의 경우 해석이 난해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강의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체육활동을 시킬지까지 관여했는데,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역대 사료와 중국 기록을 다 뒤져서 세자에게 활쏘기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분석하여 커리큘럼을 짜도록 했다. 문종은 모든 과정에 충실히 임했고 차기 국왕으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키워나갔다. 부왕의 기대와 욕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뚤어졌던 양녕대군, 사도세자와는 다른 케이스다.
세종은 일찍부터 문종을 국정에 참여시켜 직접 보고 깨달을 기회를 만들어주곤 했는데, 신하들이 “세자 저하께선 정사에 참여하기엔 너무 어리십니다.”라고 반대하자, “왕이 되어 가장 중요한 일이 정사를 돌보는 일인데, 세자가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라며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후 문종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 동안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하는데, 조선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대리청정으로 꼽힌다. 가장 실패한 사례는 영조 대의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다.
훌륭한 부모에게서,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바른 품성과 탁월한 자질, 우수한 두뇌와 수려한 외모까지 물려받았다. 일반인도 이렇게 태어나면 거의 완벽한 조건이다. 그런데 왕가의 적장자로 태어나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할아버지는 악역을 맡아 걸림돌이 될 만한 요인들을 모두 제거했고, 아버지는 유능한 수성(守城) 군주로서 국가 체제를 구축했기에, 자신은 그저 선정을 베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세종은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직접 경험했었다. 권력의 비정함말이다.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와 서로 칼을 겨눴다. 형의 자리를 빼앗았고 사랑하는 아내의 가족들이 도륙됐다. 어떻게 세운 나라, 어떻게 오른 왕위인가. 우리가 아는 세종의 품성으로 짐작컨대, 그는 정말 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적장자 문종을 잘 키워서, 잘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 숱한 피와 눈물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를 너무나 잘 아는, 그런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 문종은 또한 어떠했을 것인가.
노심초사하고 절치부심하고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게 완벽해도, 그렇게 빈틈없이 철저하게 준비해도 일이 어긋나는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