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진취, 실용과의 단절(feat. 신라)
태종(太宗)에 대해 이견이 없는 평가들이 몇 있다. 첫째,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를 얻기까지 스스로 수많은 시련과 난관을 겪어야 했기에, 다음 대부터는 완전한 정통성을 가진 장자에게 잇게 하고 싶었다. 더욱이 고려와 달리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적장자의 지위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고 힘든 시절 큰 기쁨이 되어줬던 첫아들 양녕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숱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10세 때 세자로 책봉한 후 24세 때 폐위하기까지 14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이유다.
한편으로는 대안이라 하기엔 민망할 만큼 완벽한 충녕이 준비된 채로 기다리고 있어 줬던 것이 또한 얼마나 다행인지. 건국 초기 여러 어수선함들과 어려움들, 그리고 태종이 휘몰아친 피바람들과 양녕이 일으킨 분란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마지막에 충녕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어렵게 돌고 돌아 선택된 세종이 마음껏 국정을 펼칠 수 있도록 완벽한 사전 정지작업을 한 일이다. 태종은 왕권주의자였다. 그것은 바르고 실력 있는 왕이 자리를 지킬 때 빛을 발할 수 있고, 세종은 차고 넘치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럴 경우 바르지 않고 힘을 가진 신하들은 방해물일 뿐이다.
조선에는 훌륭한 신하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신하들이 자신과 가문, 그리고 소속된 당파가 권력과 부귀영화를 독점토록 하기 위해 한 못된 짓들은 수없이 많다. 경연과 간쟁으로, 천재지변이 왕의 부덕 때문이라며 끊임없이 왕을 압박했고, 방계이거나 모계의 신분이 천하면 대놓고 무시했다. 물실국혼(勿失國婚)으로 왕실의 혼사를 장악했고, 그걸로 부족하자 왕을 직접 결정했다. 후계 지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때로는 끌어내리거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마치 이럴 거라는 걸 알았다는 듯이 태종은 문제가 될 만한 공신, 외척 등을 당분간 발호하지 못하도록 뿌리까지 깨끗하게 정리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병도 혁파해서 군권을 삼군부로 통합했다.
반면에 세종의 치세에 도움이 될 검증된 인재들을 물려줬다. 먼저 황희(黃喜, 1363 ~ 1452)는 태종에게 크게 중용되었으나, 양녕대군의 폐위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는다. 이때 태종은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사람은 그대라고 생각했거늘...”이라며 서운함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에게 중용할 것을 권하고, 황희는 18년을 영의정으로 일하며 세종 대의 수많은 업적에 이름을 올린다. 그 외에도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과 허조(許稠, 1369 ~ 1440)가 유능한 정승으로 세종을 보좌한다. 태종이 발굴한 세종 대의 인재들은 문신들 외에도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생몰미상), 화포의 최해산(崔海山, 1380 ~ 1443), 이천(李蕆, 1376 ~ 1451) 등이 있다.
셋째, 기본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한 일이다.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6조를 왕이 직접 관할하도록 했다. 반면에 간쟁 기능을 강화해 전담기구인 사간원(司諫院)을 별도로 만드는데, 대신들이 간관들을 자제시켜 달라고 하자 “간관들이 없으면 무능하고 악독한 자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것인가?”라며 물리쳤다.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16세 이상 남자에게 신분증을 소지하게 하는 ‘호패법’을 도입했다. 한성의 고질적인 물난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淸溪川)을 만든 것도 태종이다. 본래 개천(開川)이라 불리던 자연 하천에 박자청(朴子靑, 1357 ~ 1423)으로 하여금 개거공사를 하게 했다. 태종의 신임으로 일개 문지기에서 정2품 판한성부사에까지 올랐던 박자청은 한양도성, 창덕궁, 성균관 문묘, 경회루 등도 건설했다. 태종이 주도했던 정책들 중에서 화폐개혁, 양전사업 등 일부 경제 관련 정책들은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태종이 정말로 잘못한 일은 따로 있다. 태종 대 이후 명나라와의 책봉·조공 질서가 확립됐고, 이는 단순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외교정책의 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불가침한 교조적 중화주의(中華主義)로 조선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에 통치 철학인 성리학의 이원론이 결합되면서 조선은 스스로 변방인 소중화(小中華)가 됐다. 중화주의의 핵심은 한족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 민족은 오랑캐라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이다.
그렇게 이성계와 정도전이 추진했던 요동정벌을 끝으로 만주는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내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태종으로서는 불가피했을 수 있다. 2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어렵게 거머쥔 왕좌는 취약한 정통성 그 자체였다. 건국과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공신, 외척 세력들은 수시로 발호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북쪽 국경지역의 이민족들도 단속해야 했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명분, 즉 정통성과 권위를 확보해야만 했는데, 내부에서 찾을 수 없으니 외부에서 가져와야 했다. 그것이 명나라의 책봉이었다. 명은 태종 즉위 이듬해인 1401년 조선을 조공국으로 공식 인정했고, 1403년 영락제가 태종에게 고명(誥命)과 금인(金印)을 하사해 왕위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확정한다. 신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없어 당을 끌어들였고, 덕분에 만주와 함께 고구려의 기상을 잃어버리고, 정신적·문화적으로는 당에 예속되어야 했던, 그 때가 떠오른다.
실제로 태종이 명나라를 각별히 신경 쓴 흔적은 사료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조선 건국 전 1388년 이색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던 태종은 1934년 남경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명태조를 대면한 이래 명과의 외교에 집중한다. 정종의 양위와 자신의 즉위를 즉시 보고하고 승인받았으며(1401 ~ 1403), 공험진 이남 관할에 대해서도 승인을 요청했다(1405). 뿐만 아니라 조정의 의관·법도, 제문 규식과 전물의 품수 등 제도·복식·의례 전반을 명나라 예서인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따르도록 명하는 장면들이 실록 곳곳에 나타난다. ‘홍무’는 명태조 주원장의 연호다.
결론적으로 책봉·금인 하사로 왕위 정통성의 대외 확증을 받고, 의례·제도 정비를 통한 중화공동체 전략으로 ‘문명국·모범 조공국’ 프레임을 구축하고, 국경 문제도 칙서·승인 기반으로 처리하는 등 통치 전반에 외세를 개입시킨 것과 다름없다. 건국 초기 불안정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부분이 있고,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면서 명에 대한 사대가 교조주의로 확립되어 버린 이유도 있지만,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하던 자주성, 만주 수복을 꿈꾸던 진취성이 이때부터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도 사실이다. 실체 없는, 명에 대한 사대의 변주에 불과했던 효종 대의 북벌론을 거론하지는 말자. ‘사대교린’이라는 실용주의 외교정책이라는 변명도 하지 말자. 중원을 통일한 수·당과 싸워 이기고,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이룩한 원에 맞서 30년을 항쟁한 우리다.
다음으로 큰 잘못은 서얼 차별을 법제화한 일이다. 태종 15년인 1415년 우부대언 서선(徐選)이 건의한다. “종친 및 문무관의 서얼 자손에게는 현관(顯官)의 직사를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고 실제로 서얼에게 잡직과 기술직만을 허용하고 정규 문무직은 제한하는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와 같은 방식으로 운용된다. 이후 <경제육전>, <경국대전> 등에 관련 조항이 포함되면서 생원·진사시와 대과 응시 금지까지 명문화된다.
조선시대에는 다만 법제화되었을 뿐이고,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 자체는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태종은 서얼차별을 강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품서용제 등을 통해 서얼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해석이다. 크게 보면 고려와 조선은 다처(多妻)의 인정, 아들과 딸의 평등, 적서의 차별 등에서 완전히 다른 사회다. 자신의 소생인 방석의 세자 책봉에 관여한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종묘 부묘 배제와 정릉의 도성 밖 천장에 이어 그 석물을 광통교의 석재로 쓸 것을 지시하기까지 했던 행동들을 종합해 볼 때, 맥락상 적서차별 강화는 태종의 강력한 의지였다. 거기에 정적이었던 정도전도 서자였다. 한편 적서차별 강화는 이권을 나눠가질 대상의 총량을 줄여 벼슬, 토지 등을 최대한 독점하고자했던 당시 핵심 지배층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바르고 실력 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는지는 세종이 증명했다. 그런데 서얼금고법은 그 수많은 인재들을 실무·잡직에 묶어두거나 평생을 신세한탄으로 허송세월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본성과 현실에 맞지 않는 제도를 고집하다보니 수많은 문제들이 생겼다. 신분·관직을 돈과 네트워크로 보완하려다 보니 공명첩·납속·음서가 비대화되어 관직의 공공성·정당성이 훼손됐고,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기 위한 족보 위조, 양반 모칭, 본관 갈아타기 등이 성행하면서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신분을 사고팔거나 위조함으로써 조세·군역의 질서도 크게 왜곡됐다.
또한 실력이 아닌 불합리한 신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다보니 장례원과 각 고을 관아에는 신분확인 소송인 결송입안이 늘 쌓여있었고, 적서차별로 제사·상속·가계승계 분쟁이 빈발하면서 족내 갈등도 극심해졌다.
적서차별은 단순한 신분질서가 아니었다. 국가적·사회적으로 심각한 병폐와 막대한 손해를 야기했던, 하나의 사상으로서 기능했다. 성리학과 중화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을 한반도 안에 가둬버린 1차 폐쇄에 이은, 실력 중심의 인재 등용은 차단하고 그로 인한 온갖 부조리와 부패를 양산하게 만든 2차 폐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