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라서 불행했던 세자의 아들(feat. 황희)
양녕대군은 1394년 한성부 정안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사실상의 장남이 된다. 1394년은 태조 3년으로,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성으로 옮기는 등 조선의 국가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돌아가고 있었다. 1392년에는 이방원 등의 반발 속에 막내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됐고, 1393년에는 적장자였던 이방우가 사망한다. 왕조 안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후계 구도가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방원은 조선의 건국에 그 누구보다 결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그 기여로 인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상황이었다.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 선조의 능실에 제사를 지내라는 이성계의 명에 따라 동북면에 머물러야 했다. 포은 정몽주를 격살한 일로 이성계의 미움,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으며 후계니 공신이니 하는 것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1394년 명나라 홍무제가 조선이 보냈던 외교문서의 용어를 문제 삼으며 “이성계의 장남 혹은 차남을 명으로 보내라.”고 요구한다. 이성계는 “네가 아니면 황제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사람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이방원을 선택하고,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야위어서 만리 길을 탈 없이 지켜낼 수 있겠느냐?”라고 걱정하며 명나라로 보낸다. 이방원이 그해 6월에 출발해 11월에 돌아왔다는 내용이 <태조실록>에 전한다.
그렇게 욕망의 대상이 왕위였던 만큼이나 더욱 비참했을 현실 속에서 이방원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암중모색(暗中摸索)하던 그 한가운데서, 양녕대군은 이방원으로 적장자로 태어났다.
훗날 세종 즉위 후 상왕이 된 이방원이 양녕대군에 대해 회고한 기록이 전한다. “양녕이 태어나기 전 아들 셋, 딸 셋을 낳았지만, 아들 셋이 모두 요절한 상황에서 양녕은 나의 일곱 번째 자식이자 첫 번째 아들이었다. 당시 나는 정도전 일파의 압력을 받아 궁지에 몰려있었고, 앞으로 며칠이나 더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삶에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중전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양녕을 안아주고 업어주고 하며, 무릎 위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내 자식들 중 양녕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으며 나에게 양녕은 다른 자식과 달랐다.”
이복동생에게 세자의 위를 빼앗기고 정적들에게 위협을 받는 아버지에게서, 위로 세 형이 일찍 죽은 후 사실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같은 운명에 처해있던 여흥 민씨 외가의 사랑도 한 몸에 받았다. 5살이던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겪고, 다시 9살이던 1402년 2차 왕자의 난을 경험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골육상쟁의 틈바구니에서 일찍이 권력의 비정함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미천한 출생으로 인한 정통성의 한계로 평생을 히스테리컬 했던 아버지에게서, 위로 형인 효장세자가 요절한 후 사실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온갖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문보다는 무를 좋아했고, 그러다가 아버지 영조와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로, 첨예한 당쟁의 희생 제물로, 끝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며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사도세자가 떠오른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주변의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차기 국왕인 자신에게 모두가 굽실거렸다. 현철함은 타고났지만 공부보다는 놀이를 좋아했고, 문보다는 무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왕의 경연(經筵)에 대비되는 세자의 서연(書筵)을 새로 만들 만큼 차기 국왕으로서의 학문적 성취를 압박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불화했다. 수많은 후궁들을 들였고, 4명의 외삼촌을 모두 죽여서 외가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전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와도 불화했고, 이복형제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 모두가 나를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학업에 매진할 것을, 술과 여자를 멀리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성군의 자질을 갖춘 세자의 모습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마치 충녕과 같은 모습을. 그러나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모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태어나 엄하기보다는 귀하게 자랐고, 자신의 자질, 성향에 반하는 방향으로 자랄 것을 지속적으로 강요당하는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더욱이 부모는 모범을 보이지도 않고 화목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올바를 것을, 본이 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면.
실제로 양녕대군은 마치 “감히 누가 나를 막을 수 있느냐?”라고 외치기라도 하듯이 거칠 것 없이 살았다. 세상 모두가 두려워하는 아버지 이방원의 호통도,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모든 기대를 자신에게 쏟아 붙는 어머니의 눈물도 막을 수 없었다. 명나라 사신 접대연에 참석한 기생 봉지련을 시작으로, 큰아버지 정종의 애첩이었던 초궁장까지 자신의 침소로 끌어들였고, 前 중추원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빼앗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승 앞에서 개짓는 소리를 내며 광인 흉내를 내는가 하면, 매 사냥에 빠져 동궁전에서 매를 키우다가 들켜서 내시들이 모두 교체되는 등 여러 가지 기행을 일삼았다.
그렇게 계속 분란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 ‘아버지는 수많은 첩들을 들이면서 왜 나는 못하게 하느냐’는 내용의 항의 서한을 이방원에게 보낸 일을 끝으로, 24살이 되던 1418년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사람의 성향과 자질은 첫째, 선천적 조건과 후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양녕대군의 강한 성향과 무인의 자질은 일정 부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을 보면 반드시 선천적인 부분이 모두 반영되는 건 아니다. 둘째, 후천적으로 너무 귀하게만 키우면 안 된다.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겠지만, ‘귀한 자식일수록 고생을 시키라.’는 옛말이 있다. 셋째, 후천적 환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모범이다. 그러나 역시 세종을 보면 반드시 후천적으로 부모를 보고 그대로 배우는 것만은 아니다.
양녕대군처럼 선천적으로 강하고 자유분방한 성향을 타고 나서 문보다 무에 관심을 갖고 또한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면, 무조건 문으로만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고 잘하는 무를 연마하도록 길을 열어주되, 일정 부분 문을 병행하도록 안배를 했어야 했다. 또한 향후 한 나라를 책임질 국왕이 될 세자라면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더욱이 타고난 성정이 강하고 자유분방하다면, 겸손, 배려 같은 성향을 내재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했어야 했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어린 시절에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환경에 처해졌는데, 반면에 부모와 외가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하는, 어떻게 보면 뒤틀리고도 언밸런스 한 상황에서 자랐다. 이후 8살에 원자, 10살에 세자로 책봉되며 모두가 자신 보다 아래에 있는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상 자아가 거의 완성된 15세 전후에 이르러서야, 유일하게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이방원이 강력한 통제를 시작했지만, 이미 한참 늦었고, 오히려 반감과 더 비뚤어지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천하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던, 왕이 될 수 있는 세자의 위는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너무나 희귀하고 비현실적인 자리라서 ‘바란다’는 표현이 아닌 ‘꿈꾼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리다. 실제로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이방원은 목숨을 걸었고, 아버지와 불화했으며, 형제들을 죽였다. 그러나 양녕에게는 버겁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자리였다. 하지만 충녕에게는 마치 맞춤복처럼 딱 맞는 자리였다. 일반적으로 지향되고 추구되고 선호되는 것들이 반드시 모두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