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The Noble's School 2

by THE RISING SUN

김만중이 평안도 산천의 배소에서 풀려난 지 3개월 만에, 다시 경상도 남해 노도(櫓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형이 내려진다. 귀양가는 뒷모습을 다시 보일 수 없었던 김만중은 먼저 어머니를 가마에 오르시게 하고, 가마가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눈물을 흘렸다. 큰아들을 저승길로 떠나보내고 작은아들은 유배길로 떠나보낸 채, 연로하신 어머니는 홀로 계실 터였다. 김만중은 어머니를 위해 붓을 든다. 어머니는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살아있는 패설(稗說), 즉 소설을 즐기셨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책이 <구운몽(九雲夢)>이다.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성진은 우연히 팔선녀를 만나 욕망을 품게 되고, 세속으로 떨어진다. 양소유라는 남자로 태어난 성진은 8명의 여자와 혼인하고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공명을 이룬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큰 깨달음을 얻은 성진과 8명의 비구니는 불도에 정진하여 모두 극락에 들어간다.’


‘구운몽’이라는 표현은 소동파(蘇東坡)의 시 ‘동정보 표형과 백수산을 유람하며(同正輔表兄遊白水山)’에 처음 등장한다. 永辭角上兩蠻觸,一洗胸中九雲夢. ‘달팽이 뿔 위의 전쟁’ 고사를 인용한 시로, 하찮은 다툼과 명리(名利)의 허망함을 영영 끊어 내버리고, 마음속의 허황된 꿈(구운몽)을 말끔히 씻는다는 뜻이다.


<서포만필>은 시에 대한 비평은 물론 소설, 산문과 관련된 글들이 담긴 김만중의 사상이 집대성된 책으로, 1687년 두 번째 유배지인 평안도 선천에서 집필을 시작해 1692년 세 번째 유배지이자 생을 마친 경상도 남해에서 완성했다. <서포만필>에는 소동파의 <동파지림(東坡志林)>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삼국의 일을 이야기할 때 유비가 패한다는 말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고 조조가 패한다고 하면 기뻐서 소리치는데 이것이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기원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듣고 울거나 웃는 사람은 없다.”


김만중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직접 소동파의 시를 배웠다. 자신과 같이 정치적으로 불운했던, 그러나 세속의 다툼과 명리로부터 초연하여 더 크고 넓은 정신세계를 추구했던 소동파의 삶과 문학을 돌아보며 자신을 투사했을 것이다. <구운몽>은 그 안에서 탄생했다.


그렇게 김만중은 유배지 노도에서의 3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글소설인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짓고, <서포만필>을 완성했다. 칠순을 넘긴 어머니와의 세 번째 유배로 인한 작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까 두려웠던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기리는 시를 쓰다가 눈물로 글자를 적시곤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77세 희수연을 여는 것이 꿈이었던 김만중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부음도 몇 달이 지나서야 듣는다. 위리안치된 배소의 작은 방 안에 초를 켜고 한쪽에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조석으로 밥을 지어 올렸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슬픔에 젖어 병약해진 김만중은 이듬해인 숙종 18년(1692)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정경부인 해평윤씨 행장>을 남겼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2012년 10월 16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한국문학 포럼이 열렸고, 2011년 스페인어판이 출판되어 읽히고 있던 <구운몽>은 세계 최고의 대작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평가됐다. 서문에는 “김만중은 이 작품을 자비롭고 교양있는 그의 어머니께 바쳤으며 이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표현했다.”고 쓰여 있다.


<구운몽>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계기는 구한말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Gale, 1863 ~ 1937)의 1922년 영어판 출판이었다. 이후 현재까지 네덜란드어, 루마니아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베트남어 등으로도 번역되어 세계인이 함께 읽는 작품이 되었다.


<구운몽>의 인기는 출간 직후부터 대단했다. 당시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가 밀집한 종로의 베스트셀러였던 <구운몽>은 현재 한글본 193종, 한문본 223종이 전하는데, 이는 한문을 아는 지적인 독자들 사이에서 더 유행했음을 의미한다. 저자와 여염을 넘어 규방에서까지 널리 읽히던 <구운몽>은 마침내 궁궐의 담을 넘는다.


승정원일기 1751년 기록에는 영조(英祖)가 <구운몽>의 작가가 누구인지는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761년에는 다시 영조가 <구운몽>이 아주 좋은 글이라고 칭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자로 유명했던 정조(正祖)도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는 얘기를 듣고,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는 회갑연에 맞춰 <시경>에서 시 100편을 골라 <모시백선>이라는 책을 만들어 어머니께 올린다.


<구운몽>은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청나라의 명작 <홍루몽>과 비견되며, 개작한 장편 소설 <구운루>와 추가로 변작된 <구운기>가 잇따라 출판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일본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樋口奈津, 1872 ~ 1896)의 필사본이 야마나시 현립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녀는 주로 소외된 계층이나 봉건사회에서 비극적 운명에 놓인 여성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썼는데, 가난했던 습작 시절 봉건시대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남성에게 맞서기도 하는 진보적 여인상이 등장하는 <구운몽>을 필사하며 꿈을 키웠고 평생 문학의 지표로 삼았다.


흔히 <구운몽>의 주제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다는 일장춘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유교, 불교, 도교 등 당대에 추구되던 정신세계가 집약되어있다. 유교적으로 ‘효(孝) 사상’과 당대의 양반층이 사회적 이상으로 삼았던 ‘입신양명’과 ‘부귀영화’가, 불교적으로는 없으되 있으며 비어있으되 충만한 금강경의 ‘공(空) 사상’이, 도교적으로는 ‘허무(虛無)’, ‘염담(恬淡)’, ‘무위(無爲)’, ‘신선사상’ 등이 담겨 있다. 더욱이 <구운몽>이 담고 있는 그 모든 사상들의 기저엔 어머니 윤씨부인과 아들 김만중 사이의 사랑이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 사랑이다. <구운몽>이 시간과 국경을 초월해 생명력을 갖는 이유다.


김만중은 문형(文衡)이자 대학(大學)으로 불리는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 양관(兩館) 대제학을 지냈던 당대의 대학자였다. 윤씨부인 역시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서인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평소 아들에게 송강 정철과 같이 한글로 소설을 써 볼 것을 권했고, 김만중은 당시 패관문학(稗官文學)으로 천시되던 한글소설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은 영조는 물론 패관소품체 등 당시 유행하던 참신한 문체를 배척하고 순정고문(純情古文), 즉 고전적 문체로 돌아가도록 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당사자였던 정조의 인정까지 받아낸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김만중은 <서포만필>에 “한문 시문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 진정한 이 땅의 문학은 한글로 쓰인 것이다.”고 썼다. 주자주의(朱子主義)를 견지하면서도, 주자주의적 문화관과 문학관을 비판했으며, 우리말과 글로 이루어진 한글 문학의 독자성과 의의를 주장했던 김만중의 선진적이고도 주체적인 견해는 우리 문학관의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만중에게는 문효(文孝)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노론은 “사람됨이 청렴하게 행동하고 마음이 온화했음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평가했고, 당쟁의 상대였던 남인도 “김만중은 문사(文辭)에 능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어머니를 잘 잠 섬긴다고 소문났었다.”고 평가했다.


17세기말의 한반도, 난중에 태어난 유복자를 향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교육, 그러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쟁으로 얼룩진 난세 속에서도 높은 학문과 정신을 이룬 아들의 사랑은, 당시 천시되던 한글소설이라는 형식이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할만큼 고귀한 문학으로 승화되었고, 이제는 시대를 넘고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에게 공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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