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과 어머니 윤씨부인

The Noble's School 1

by THE RISING SUN

인조(仁祖) 14년이자 병자호란 발발 이듬해인 1637년 3월 6일, 강화도를 떠난 피난선 안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 ~ 1692)이다. 아명(兒名)은 배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선생(船生)이었다.


김만중은 유복자였다. 아버지 김익겸(金益謙, 1615 ~ 1637)은 1637년 1월 22일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시키기 직전, 남문루에 쌓아두었던 화약궤들의 폭발로 폭사한다. 두 달 전 군기시(軍器寺)가 운반해 두었던 4천 근의 화약이 폭발한 것으로, 세찬 불꽃이 치솟으며 문루가 날아갔고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당시 폭발의 원인에 대해서는, 김상용(金尙容)의 담뱃불 실화라는 주장과 충정에서 비롯된 의도된 방화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따로 논하지 않는다. 다만 김익겸에게는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이후 김익겸은 광산 김씨 명문가로 생원시에 장원한 수재이자 목숨을 바쳐 오랑캐에 항거한 충절의 상징이 된다. 조선 예학의 대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판중추부사를 지낸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각각 그의 조부, 백부다. 두 사람 모두 문묘 18현으로 배향됐고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도 당대의 명문가 해평 윤씨 가문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고조부, 역시 영의정을 지낸 윤방(尹昉)이 증조부다. 할머니였던 선조의 딸 정혜옹주로부터 예법을 물려받았고 소학 등을 통해 학식을 키웠다.


김만중의 가족이 살아가던 17세기는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였다. 밖으로는 청나라의 침략, 안으로는 정쟁이 끊이질 않았다. 가장 큰 고통은, 나라로부터 받은 건 억압과 수탈 뿐이었음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최전선으로 내몰렸던 백성들이 겪었을 것이고, 나라와 백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파와 가문의 이익 수호에만 몰두했던 양반 지배층에게는 오직 비판과 비난만이 가당하겠지만, 여기서는 한 가정사에 집중하고자 한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광산 김씨와 해평 윤씨가 만나 이룬 가정은 전란으로 파탄이 난다. 훗날 시신조차 찾지 못한, 남편의 순절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종복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 21살의 젊은 어머니 곁에는 큰 아들 김만기(金萬基, 1633 ~ 1687)가, 태중에는 작은 아들 김만중이 있었다. 피난선에서 김만중을 낳으며 어머니는 다짐했다. 두 아들을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재로 잘 키워내는 것만이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고.


윤씨부인은 성리학적 질서에 갇히지 않은 진보적인, 지적이고 강한 여성이었다. 왼손에는 미음그릇 오른손엔 회초리를 들고 두 아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다. 본래 가학(家學)이 있었던바 <소학>, <사략(史略)>, <당률(唐律)>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는데, 여름에는 발을, 겨울에는 병풍을 치고 가르쳤다. “유복자로 공부를 조금만 잘하면 칭찬의 도가 지나칠 수 있고, 기대에 미흡하면 안타까운 표정이 드러날 것이니 이를 가려서 교육에 도움에 되게 하고자 한다.”


윤씨부인은 몸소 베를 짜고 수를 놓아 생계를 꾸렸지만 땔감이 없어 술통을 쪼개 쓸 정도로 가난했다.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곡식과 옷감을 바꾸어 책을 샀고, 그마저도 어렵게 되자 이웃에 살던 홍문관 서리에게 빌린 책을 밤새 베껴서 아들들에게 읽혔다.


어머니의 극진한 정성과 교육으로 김만중은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6세에 진사시에 장원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소 짓지 않았다. 1665년 29세 되던 해에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을 때 비로소 작은 잔치를 열었다. 형 김만기도 1652년 생원·진사시 양시에 장원하고 1653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윤씨부인은 자신의 생일, 회갑 때는 잔칫상을 차리지 못하게 했고, 오직 두 아들이 대과에 급제했을 때만 잔치를 열었다.


윤씨부인은 또한 가르쳤다. “비록 장부가 옷을 기워서 입었다고 사람들이 조롱하며 웃을지라도 어찌 부끄럽다 생각하겠는가? 네가 벼슬에 나가 입게 되는 의복을 그 전에 입던 베옷보다 화려하지 않게 하여라.”


김만중은 정언(正言), 지평(持平), 교리(校理), 동부승지,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대제학에 오른다. 홍문관과 예문관, 집현전의 수장으로서 학문의 기준을 세우고 글을 평가했다. ‘글의 저울’을 의미하는 문형(文衡) 또는 대학(大學), 문장을 관장하는 주문지인(主文之人)으로 불리던 자리다. 품계는 판서급(判書級)인 정2품에 해당하지만 학문과 도덕적으로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 석유만이 오를 수 있었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문에도 큰 명예로 여겨졌고 3공(三公) 6경(六卿)보다 훨씬 높게 예우하였다. 전임 대제학이 후보자를 천거하면 삼정승,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 한성부윤 등이 모여 다수결로 결정했다. 스스로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다.


서인과 남인 간의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하며 환국이 반복되던 17세기말, 서인으로 태어나 두 차례 예송(禮訟)과 두 차례 환국(換局)을 정국의 중심에서 맞아야 했던 김만중 형제에게도 시련이 닥친다. 1687년 김만기는 사화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다 숨을 거두고, 김만중에게는 연달아 유배형이 내려진다. 평안도 산천으로 유배 가는 아들의 뒷모습에도 어머니는 흔들림이 없었다. “영해로 유배되는 일은 선현으로서도 면치 못한 것이니, 그곳에 가거든 자신을 소중히 하고, 나를 염려하지 말라.”


한평생 순절한 남편의 자리를 지키며 두 아들을 훌륭한 관리로 키워낸 윤씨부인은, 귀양 간 아들의 자리를 지키며 손자를 가르치고, 또 증손자를 가르쳤다. 아들들을 가르칠 때처럼 발을 치고, 병풍을 치고 가르쳤다. 손자 김진규, 증손자 김양택은 모두 두 아들 김만기, 김만중에 이어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 양관(兩館) 대제학에 올랐다. 형제 대제학, 부자 대제학, 3대 대제학이었다.


김만중은 유배지 노도에서 어머니를 위해 소설을 쓴다. 오늘날 세계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어, 세계인이 함께 읽고 있는 구운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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